[엄상익의 친일논쟁17] 사회주의자 인정식 등 우리가 숨긴 민족의 변질

사진은 월간지 <인물평론> 1940년 1월호에 인정식이 기고한 논설. ‘내선일체의 문화적이념’이라는 제목으로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는 내용의 글이다.

1930년대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조선총독미나미의 책상 위에 서류 하나 놓여 있었다. 양면 괘지에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와래라와 고고쿠 신민나리 주세이 못데 궁고쿠니’(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

김대우라는 조선인이 만든 ‘황국신민의 서사’였다. 일본과 조선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아침저녁으로 그 문장을 외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만든 조선인 김대우는 3.1운동 당시 파고다공원의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 정도면 변절이 아니라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대동방주의’를 표방하면서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 민족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과의 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했다. 그는 무엇에 자신의 신조를 팔아넘겼을까.

윤치호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내선인의 동일운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일본제국이란 거대한 배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태우고 큰 바다로 나가려고 하고 있다. 만약 이 거대한 배가 불행히도 풍파를 만나서 난파하면 그 속에 타고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한꺼번에 운명을 같이하고 말 것이다.”

나는 민족운동을 하던 그들이 왜 그렇게 됐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의 논문들을 많이 봤다. 김문집이 쓴 ‘조선 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이란 논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조선인은 완전하게 일본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조선이 자립을 한다는 것은 한강의 작은 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상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일본인과 동족이 되어서 권리와 의무를 동일하게 향유하는 신민이 되는 길이다.”

그들의 의식변화의 배경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었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변질된 것일까. 아니면 영혼이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나는 자료들을 통해 일제시대 지도자나 일반 민중의 의식구조를 살펴보았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손병희는 법정에서 한일합병이 되면 살기가 좋아지고 문명화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조선의 주권을 돌려달라고 했다. 다른 민족 대표들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걸 재판기록에서 읽었다.

한일합병 당시의 많은 조선인의 의식은 병합에 의해 선진국 국민인 일본과 같은 국적과 권리를 가지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나 합병 후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차별이었다. 그게 3.1운동의 기폭제였는지도 모른다. 차별을 받으면서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양반과 노비로 분류됐던 조선조에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하인 1928년 전라도 평의회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인 의원 야마노가 발언 중에 “조선 농촌이 피폐한 것은 보통학교를 남설(濫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인들은 교육을 시키면 일을 안 한다는 비하하는 의미가 배어있었다. 박준규, 박이규 등 조선인 의원들이 조선 민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말이라고 들고 일어났다.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휴회가 선언됐다. 그 발언은 전라도내 일본인과 조선인의 감정 문제로 확대됐다. 당시 도지사는 조선인 석진형이었다. 그는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총독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도지사를 하고 도의원을 한 한국인들은 지금의 잣대로 보면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을 위해 의회에서 싸웠다. 그걸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당시 그들의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의식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국적과 민족개념은 다르게 보는 것 같았다. 미국, 중국이 그렇듯 한 나라 속에 여러 민족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도지사이고 도 의원인 그들은 민족은 조선 민족이고, 국적은 일본이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굳이 독립을 해서 별개의 나라를 세우기보다는 일본국적 아래 동등한 시민권을 가지는 조선 민족이기를 바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3.1운동의 실패로 많은 조선인이 절망했다. 일본은 절대적이었고 외국 열강은 일본편이었다. 일본은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어 있었다. 만주를 침략하면서 경제적 호경기가 왔고 중국을 점령하면서 일본은 세계의 군사대국으로도 등장했다. 그런 속에서 조선인들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다. 차라리 일본 체제에 순응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다만 일본과 차별받지 않는 그런 일본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조선은 이미 30년간 일본통치 하에 있었고 한일합방 후 태어난 조선인 신세대들이 사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구한말을 기억하는 것은 노인들뿐이었다. 그나마 무능한 왕조와 탐관오리 그리고 양반의 횡포 등 나쁜 기억이 더 많았다. 이제 조선의 다수 엘리트들은 서양이 아니라 일본을 새로운 멘토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 의회는 조선에 관한 행정관할을 척무성에서 내무성으로 옮기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척무성은 식민지를 관할하는 부서였다. 일본은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로 취급하고 있었다. 자치권이 인정되고 총독이 별개의 법령을 제정할 권한이 있었다. 이제 조선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고 일본 그 자체였다. 내무성에서 관할한다는 법 개정의 의미는 조선이 일본 본토의 한 지방이 된다는 의미였다. 혼슈, 시코쿠, 큐슈같이 본토의 한 지역단위가 되는 것이다.

조선총독은 한 지방의 행정관으로서 내무대신의 명령을 따르게 됐다. 식민지 시절의 제도와 정책이 바뀌었다. 일본은 교육령을 개정해서 조선의 모든 교육기관을 일본과 같이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통일했다. 조선인은 일본 국민으로 일본인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도록 법에 규정되었다.

변호사인 나는 친일사건을 맡아 일제시대 자료들을 보면서 그들이 변절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 영혼이 바뀌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인정식 전후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39년 4월호 시사잡지 <삼천리>에서 사회주의자 인정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몇몇 지도자 개개인이 전향한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전체가 일제에 전향했다. 이제는 오직 일본제국의 정책에 끝까지 협조하는 충실한 국민으로서만 개개인의 조선인이 존재하며 금일의 조선인의 정치적 노선이란 이 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조선인의 의식변화는 식민 지배를 통한 일상생활의 향상이 민족적 전향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민중의 생활이 구한말보다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주침략에 따른 만주붐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가 민족적 저항을 한껏 누그려뜨렸다고 했다. 그는 일본의 중국침략을 통해 돌아올 복리와 번영을 기대하는 조선민중의 자발적인 의사가 내선일체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 일본의 지원병제도는 조선인 중하층민의 신분상승의 기회로 이용되고 이제 조선의 대중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일본군대에 협조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변질됐다고 했다.

그 시절 독립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소수의 선각자들은 해외에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민족의 정신적인 타락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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