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⑭] 2007년 7월, 이상한 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2005년 5월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11빌딩에서 현판식을 갖고 정식출범했다. 왼쪽 두번째가 강만길 위원장, 맞은편에 함세웅 신부, 김희선 전 국회의원 등의 모습이 보인다. 위원회는 2009년 11월 30일 해산하고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서 업무를 대신 했다. <사진 연합뉴스>

2009년 7월 20일 오후 2 시경이었다. 거리는 뙤약볕으로 후끈 달아 있었다. 나는 ‘청계11빌딩’이라고 금속판 위에 이름이 새겨진 7층 빌딩으로 들어갔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있는 건물이었다.

붉은 화강암 바닥으로 된 로비에 경찰관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한 복도에는 희미한 빛을 뿌리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넓은 유리문이 굳게 닫혀진 사무실이 있었다. 보안카드를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의 벽에 넓은 공고판이 붙어 있고 두툼한 서류뭉치가 마치 밧줄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 같이 줄에 매달려 걸려 있었다. 위원회에서 친일파로 결정한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그 명단을 들춰보았다.

서춘, 장덕수, 진학문, 모윤숙, 노천명 등 모두 소년시절부터 책에서 보았던 낯익은 이름들이다. 그들이 해방되고 60년이 흐른 2000년대에 왜 친일파가 된 것일까.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춘’이라는 이름에서 책에서 본 1919년 2월 8일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회관은 조선인 유학생 6백명 가량이 꽉 들어차 있었다. 단상에서 한 청년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 조선 민족은 4천년 빛나는 역사와 단일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에 와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지낼 수는 없습니다. 이 치욕의 역사적 현실을 더 이상 참아서는 안됩니다.”

그곳에 입회하고 있던 일본 고등계 형사의 입에 문 호루라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찔렀다. 발언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모여있던 6백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 만세!”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조선유학생들의 통곡과 아우성이 회관에 가득 찼다. 그랬던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친일파가 되어 위원회의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까 의문이었다.

노천명의 시 ‘사슴’이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우리들이 선망하던 시인이 왜 친일파가 됐을까. 그렇게 해서 잘 먹고 잘 살았을까. 사도 법관이라고 불리던 김홍섭의 수필집에서 시인 노천명의 죽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김홍섭 판사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가 어느 날 김 판사에게 서대문 언덕 위 산동네에서 외롭게 살던 여자가 죽었으니까 가서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김 판사는 양철대문을 한 판잣집 구석방에서 고독하게 죽어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그 머리맡의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그녀가 쓴 시집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시집을 보고 김홍섭 판사는 죽은 이가 노천명 시인이라는 걸 알았다.

장덕수도 암살당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알고 있었다. 진학문이라는 인물도 기억이 났다. 일제시대 인도시인 타고르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다. 그들 대부분이 민족의식을 가졌던 그 시대의 엘리트였다. 나는 그들의 영혼이 죽은지 수십년 후에 왜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야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나는 그들을 단죄하는 위원회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 위원회 안에 어떤 존재가 어떤 자를 가지고 친일파를 규정하는 것인지 한번 직접 부딪치면서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잠겨진 유리문 앞에서 서성거릴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두 남자가 말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친일파들한테서 이의신청이 100건이나 들어왔어.”
“이의신청은 개뿔, 친일파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들의 단순한 대화에서 나는 어떤 두꺼운 의식의 벽 같은 걸 느꼈다. 내가 그중 한 남자에게 말했다. “친일파의 대리인으로 왔습니다. 이의신청을 하기 위해”

그는 나 같은 사람을 ‘개뿔’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후 위원회 사무실 구석 방에 있었다. 구석에는 종이 박스가 가득 쌓여있고 방의 가운데 작은 탁자가 하나 덜렁 놓여 있었다. 10여분 기다리니까 복도에서 만났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가 녹음기를 탁자 위에 놓고 스위치를 누른 후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연수란 인물의 가족이 친일반민족행위자란 통지문을 받았는데 이의를 제기하려구요.”
“뭘 이의 하시는 건데요?”

그가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위원회에서 보낸 결정문을 꺼내 그에게 보이며 물었다.

“기본적으로 죽은 본인이나 가족의 입장에서는 절대 친일파가 아니라는 생각이구요. 그리고 여기 결정문을 보면 관계자의 의견을 듣고 신중히 결정했다고 써있는데 관계자 누구의 의견을 들었다는 건가요?”
“그건 조사관이 가족들을 불러 확인하고 그 의견을 들었다는 겁니다.”
“가족들은 소환장을 받은 적도 없고 의견을 말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결정문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네요.”
“가족을 불러 묻지 않더라도 관보 같은 객관적인 자료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기계적인 기준으로 처리한 것 같았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그에게 물었다.

“일제시대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부 친일파인가요?”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를 했던 사람들은 예외없이 친일파로 결정했습니다.”
“일본군 장교는요?”
“당연히 친일파죠.”
“박정희 대통령은요?”
“친일파 조사 대상이 되지 않는 걸로 했어요.”
“왜요?”
“그렇다고 하면 그냥 그런 줄 아세요.”

그가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일제시대 헌병이나 경찰의 앞잡이를 하면서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한 생계형 친일이라 봐주기로 했습니다.”
“위원회 문 앞에 계시됐던 서춘이나 장덕수 등의 인물은 어떻게 친일파가 된 건가요?”

그의 눈에서 아니꼽다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찍어 누르는 어조로 한마디 던졌다.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느냐가 역사에서는 중요한 거겠죠.”

그의 의식의 본질이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그 칼을 가진 사람과 싸우고 싶은 본능이 일어나고 있었다. “담당조사관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건 절대 안됩니다. 비밀입니다.”
“왜요? 위원회는 정식 국가기관 아닌가요? 경찰, 검찰, 안기부 어느 곳이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담당 조사관 이름을 알리고 서류에 남기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왜 비밀입니까? 법에 공직자는 예외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업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조사관인 당신은 누구입니까?”
“제가 누구인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는 떳떳하지 못했다. 자신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원회를 나와 우리 사회에서 좌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대학동기를 만났다.  언론사 노조위원장을 한 그는 좌파 미디어를 운영하기도 하고 공영방송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에 조사관으로 간 인물들 중에는 진짜 좌익이 많아. 제도권에 노출되어 있는 나같은 좌파와는 또 다른 진짜 계급투쟁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 같은 좌파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논쟁할 필요도 없어. 네가 맡은 인물이 지주고 자본가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더 이상 판단할 여지가 없는 거야.”

나는 갑자기 이상한 세상과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규정한 헌법이 지배하는 공화국의 변호사였다. 개개의 인간이 이념이나 국가 이상으로 소중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조사관이라는 그는 자신이 역사의 칼자루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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