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⑩] 대한변협신문과 1920년 창간 당시 동아일보

동아일보 창간호

<대한변협신문>을 책임지고 2년간 만든 적이 있다. 1만명이 넘는 변호사 단체인 대한변협은 현대판 유림일 수 있었다. 재야 선비들이 세상을 향해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라는 생각이었다. 제작비나 인건비 그리고 광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압력이 들어와도 물리치는 데 큰 힘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부 강성여론이나 비난만 견디면 될 것 같았다.

나는 편집권을 독립시키는 규정을 만들어 변호사총회를 통과시켰다. 변협회장의 간섭을 제도적으로 막을 의도였다. 나는 어떤 신문을 만들까 생각했다. 작은 신문이지만 권력과 성역에 도전하는 독자적인 강한 색깔을 가지게 하고 싶었다. 일반 언론이 다루지 않는 성역들을 건드리는 송곳이 되어 보기로 했다. 국정원과 검찰 법무부 대법원과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을 대상으로 삼았다. 노조나 장애인과 종교계 문제점도 따질 생각이었다.

세상은 대한변협신문 1면의 제목을 엘리트 지성인인 변호사들의 의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대한변협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 기자들은 대한변협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롤 모델은 일제시대 홀로 떠 있는 섬 같은 <동아일보>였다.

1920년 봄경이다. 조선총독 사이토가 민간신문을 허락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구한말 <매일신보>의 편집장이었던 스물일곱 살의 청년 이상협은 독자적인 신문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 시절 일본 사회에서 언론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수상이나 조선총독이 언론에 견제당하고 절절매는 세상이었다. <아사히신문>은 조선의 초대총독 데라우찌의 정경유착을 거론하면서 그가 조선의 왕이 되려 한다고 맹공격했었다.

조선총독은 시모노세키를 떠나 관부연락선에 실려오는 일본 신문들을 부산항에서 압수해서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일본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론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 경성에서 신문을 만들고 싶은 이상협은 투자자가 절실했다. 그러나 수익성 없는 신문에 돈을 쓸 사람은 없었다. 돈은 왕족출신이나 지주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채를 하거나 땅 투기를 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몇 사람을 모아 고창갑부의 아들 김성수를 설득했다. 아들의 말을 들은 고창갑부 김경중은 경주 최부자 등 몇 명의 재산가와 힘을 합쳐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사장을 박영효로 내세웠다. 조선의 인재들이 동아일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내부 회의 내용을 보면 시대를 통찰하고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짚고 있는 점들이 감탄할 만하다. 내부 회의에 참여한 대주주의 아들 김성수의 이런 말이 남아있다.

“왜놈들이 새로운 통치 방법으로 우리를 더욱 얽어매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저들의 고등술책입니다. 사이토의 문화정책이란 ‘총이나 칼 대신 아편으로 우리 민족의 혼까지 빼내서 지배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등술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좀 더 높고 넓은 안목으로 우리의 신문을 통해 맞서야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유근이 덧붙였다.

“맞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백마디보다 신문의 한 줄이 조선인을 감동하게 한다면서 조선 신문들의 논조를 걱정하지 않았습니까?”

동아일보는 장덕수의 창간사부터 시작해서 연일 불을 뿜었다. 일본통치의 악정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에 대한 공판을 보도하고 매일 민족의 애환을 반영하는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동아일보는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을 현상모집하는 공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 다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평양의 시위가 가장 규모가 컸다. 동아일보는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일제시대 한민족을 각성시키고 그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피를 흘리는 십자가를 졌음은 물론이다.

대한변협신문

대한변협신문의 편집인으로서 나는 신문이란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년간 원고지 위에 세상을 향한 외침을 한자 한자 또박또박 써내려고 노력했다. 선물로 받은 그 축쇄판들은 내 삶의 발자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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