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의뢰인에게 소송당해 20년 고통…인간적·문학적 변론 깨달아

겉멋이 들거나 기계적인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바늘 끝으로 쓰는 것 같이 섬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일제시대는 그래서 법을 하는 사람에게 문학도 같이 가르치고 법문학부라고 했다. 변론서 안에 기록되는 현란한 법률지식은 인공지능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변호사인 고교 선배가 카톡으로 이런 고민을 보내왔다.
“며칠 후 형사 변론에 참여해야 하는 데 이미 다른 변호인들이 치열하게 접근한 사건으로 항소심의 중간에 가족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끼어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변론을 더 할 수 있을지 감감하여 도망자처럼 쫓기는 심정입니다. 산더미 같은 사건기록을 앞에 놓고 눈이 침침합니다. 사무실이 너무 더워 몇 시간만 있으면 더위먹기 십상입니다. 사실관계라도 파악해야 변론의 균형을 찾을 수 있고 선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냥 푸념을 늘어놓아 봤습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변론을 엄공의 특별한 변론방식 즉 인간적 문학적 비법률적 요소를 가미하여 접근해 볼 생각입니다.”’

전문가라는 직업을 가진 변호사끼리의 내부적인 의견교환일 수 있다. 다른 변호사들이 이미 법률논쟁을 한 사건에서 왜 그의 의뢰인은 유독 그에게 변호를 해달라고 부탁했을까. 그는 로비의 명분이 되는 전관 경력도 없다. 병들고 늙었다. 결국 그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아닐까.

내가 나의 변호사에게 바란 것은 한마디 외침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피를 흘리면서 나는 직업적인 또 다른 눈이 열렸다. 재판을 받는 사람마다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검사나 판사는 법률적 관점에서 그런 걸 간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호사는 그런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본문 가운데)

나는 이상한 의뢰인에게 민형사소송을 제기당해 20년을 고통 받은 적이 있다. 그 여성은 한번 물고 나서는 그만둘 줄을 몰랐다. 하도 집요하니까 법관들조차 그 여자의 얘기를 믿는 것 같았다. 담당했던 대법관마저 “뭔가 변호사가 잘못이 있으니까 저 여자가 저렇게 하겠지”라며 의혹의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내가 소송을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나를 대신해 줄 변호사를 찾았다. 법을 잘 아는 변호사는 주위에 흘러 넘쳤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현란한 법률지식이 아니었다. 재판장 앞에서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법률논쟁이란 독화살을 맞은 사람을 놓고 떠드는 것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그 화살이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 날아온 방향이 어디인지 그런 부수적인 것들만 가지고 놀이를 하듯 떠드는 게 법률논쟁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중요한 건 화살을 빼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변호사를 찾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사람이 없었다. 법원장을 지낸 선배 변호사에게 나의 사건을 맡겼다. 내가 패소했다. 나의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대법관들이 기록만 가지고 재판하니까 그 여자가 악질인 걸 모르는 거지. 그냥 똥 한번 밟았다고 치고 참아.”

나는 그 말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내가 과연 결백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돈을 받았으니까 코인을 넣으면 움직이는 인형같이 루틴한 일만 했을까. 내가 요구한 건 재판에 지더라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외쳐주는 것이었다. 40년 가까이 법의 밥을 먹어오면서 재판의 문제점은 알고 있다. 판사들은 그저 보통사람이다. 전능하지 않다. 틀릴 수 있었고 그 희생자가 나일 수 있었다.

내가 나의 변호사에게 바란 것은 한마디 외침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피를 흘리면서 나는 직업적인 또 다른 눈이 열렸다. 재판을 받는 사람마다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검사나 판사는 법률적 관점에서 그런 걸 간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호사는 그런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법률전문가로 법률논쟁은 당연한 전제다. 그렇지만 변호사가 법률적 문제점을 놓쳤다고 하더라도 판사에 의해 걸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애절한 내면이나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압축 가공해서 법정에 내놓는 건 변호사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다. 겉멋이 들거나 기계적인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바늘 끝으로 쓰는 것 같이 섬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일제시대는 그래서 법을 하는 사람에게 문학도 같이 가르치고 법문학부라고 했다.

변론서 안에 기록되는 현란한 법률지식은 인공지능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아니 인간보다 월등히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판결문도 과거의 판례 데이터와 법률이론 그리고 양형기준에 따라 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판사가 인간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늙고 아픈 변호사에게 왜 변론을 부탁했을까. 재판의 늪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의 심정에 공감하고 그 마음을 전달해 달라는 희망을 가지고 부탁한 건 아닐까. 나는 변호를 그런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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