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무서운 정치인’ 사이토 총독…”총칼보다 문화 앞세워”

나는 30대 중반 무렵 대통령 직속의 조직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대통령의 시각으로 세상을 봐야 하는 것 같았다. 국가라는 것은 무엇인지, 장차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랜드 플랜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가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깃발을 내걸고 국민들을 이끌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꿈인 것 같았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국가도 경제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거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부산 마산에서 시민들이 민주화를 외치고, 이듬해엔 광주에서 불이 붙어 그 불길이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 내내 그 불씨가 남아 있다가 6.10항쟁으로 다시 불이 활활 타올랐다. 김대중 김영삼은 이 나라 민주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노태우역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구호로 내세워 대통령이 됐다. 국민적 저항을 본 통치자는 시대 조류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국가라는 배의 키를 꺾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숨겨진 역사 속에서 능수능란한 정치인을 발견했다.

사이토 총독 <출처 연합뉴스 카드뉴스>

일제시대 조선 총독 사이토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인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전 민족의 영혼을 개조하려 했던 것 같다. 그의 통치계획이 드러난 초창기 조선 총독부 수뇌회의 광경을 관련자료들을 재조립해 묘사해 본다.

1919년 9월2일 오후 4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가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2대총독 하세가와가 물러났다. 그가 역을 나와 마차를 타고 출발하는 순간 뒤에서 폭파음이 났다. 폭탄을 던진 조선인 강우규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 행위는 조선민족이 사이토에게 던진 메시지였다.

닷새 후 총독부 회의실에서 수뇌회의가 열렸다. 총독인 사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선민족의 반항적 시위는 우리 정책에 잘못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총칼로 지배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이 있고 문화가 앞장을 서야 합니다. 정치란 100년 앞을 내다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가며 유유히 통치해야 합니다. 총칼로 민중을 굴복시키는 거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나는 이 땅에 일본의 정신과 제도를 옮겨놓을 것입니다. 조선인들이 일본문화를 좋아하게 할 것입니다. 늙은이는 차례로 죽어갑니다. 이제부터 조선 땅의 어린이들을 근본부터 새로 만들겠습니다. 100년 200년 뒤의 조선을 위해서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이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게 해야 합니다. 교육과 문화로 그들을 세뇌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가 조선인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해 묻자 헌병사령관이 이렇게 대답했다.

“만주에 김좌진 홍범도의 부대가 연대병력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2개 사단을 증강해 놓은 상태입니다. 나남의 일본군 19사단과 평양의 77연대 병력은 만주의 밀림지대로 쫓겨 들어갈 조선독립단을 완전소탕할 수 있도록 작전계획을 짜놓고 있습니다. 작전이 개시되면 남만철도 수비대 병력도 합세시킬 예정입니다. 저희는 조선인 무장세력에 대해 비밀공작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편과 금덩어리만 주면 만주의 군벌과 마적들은 저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들을 앞세워 무장 조선인들을 봉쇄할 것입니다. 그 공작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조선민족과 만주족 사이에 적대 감정을 일으키면 일본으로서는 군사비와 치안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조선인 사회주의 세력은 어떻습니까?” 사이토가 물었다. 일본도 공산당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에서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은 게 없기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고 그 탈출구로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결성된 지 얼마 안되는 조선인 사회주의 조직은 상해파와 러시아파로 대립되어 주도권을 다투고 있습니다. 두 세력이 조선에 경쟁적으로 세력을 침투시키고 있고 코민테른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상해파도 다시 내분이 일어나 이동휘파와 여운형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오염된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조선 내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민족주의 색채가 짙지만 점점 분파작용을 일으킬 것으로 봅니다.”

보고를 들은 사이토 총독이 옆에 있던 미즈노 정무총감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으로 내달리려고 하는 과격한 정열을 기술적으로 잘 다룰 필요가 있어요. 그런 정열을 문화, 예술, 스포츠로 쏟아버리게 하면 과격사상과 파격 행동이 둔화되는 겁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조선사람을 문화적으로 통치한다는 좋은 여론을 조성할 수 있구요. 나는 매질보다는 선심 공세를 과감히 밀고 나갈 겁니다. 내가 보는 조선인들은 현실타산이 빠르고 무사안일을 좋아합니다. 조선인들이 ‘우선 나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주의에 젖어들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항일분자와 조선 민중 사이에 벽이 생기고 분열되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조선총독인 나는 권력자가 아니라 정치인으로 존재할 겁니다. 나는 조선인에게 먼저 자유와 문화라는 포도주를 선물하려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정책으로 신문을 허용합니다. 다만 신문들마다 색채가 다르게 할 겁니다. 총독정치에 적극 동조하는 신문 하나, 조선사람들이 제멋대로 지껄이게 하는 민간신문 하나, 그리고 중립적인 신문 하나 해서 세개쯤 허용할 것입니다. 조선인 신문이 마음대로 지껄이면 경무국장과 헌병사령관은 골치아프겠지만 현명하게 잘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사이토는 교활하고 무서운 정치인인 것 같다. 그때 우리의 상해 임시정부나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사이토의 이간과 분열공작에 맞섰을까. 그에 대한 자료는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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