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명문가 부자들의 정당한 ‘분노’

“고창과 장성 일대의 땅들이 대부분 우리 증조부의 소유였지. 수십개의 부락민들이 우리 집안의 소작인들이었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기오면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했어.(중략)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농토를 다 내주고 우리 집안에서 간척한 땅이 예외가 되어 남아 있었거든. 그 무렵 큰아버님이 국무총리였고 친척 형님이 동아일보 회장이었지. 그때 거의 거저 주다시피 그 사람들에게 땅을 넘겼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많은 부분의 땅이 뒤에서 시위를 조종한 좌파단체쪽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하더라구.”(본문에서) 사진은 고창 청보리밭 <사진 고창군청>

변호사인 나는 우연히 구한말 대지주였던 ‘고창 김씨가’의 소송을 맡게 된 계기로 그 집안을 깊숙이 들여다 본 적이 있다. 조선말 농민이었던 그들은 개항이 되자 쌀 무역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됐다. 관료가 되어 권력으로 부를 얻지 않고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경제활동으로 재력을 형성한 것이다.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고 화적떼들이 들끓는 시대 속에서 타겟이 되었을 그들은 요행히도 살아남았다. 그들은 경주 최부자 집과 쌍벽을 이루면서 명문가가 됐다. 일제시대 대부분의 지주들이 산업자본에 먹혀 스러지는 과정에서도 고창 김씨가는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본 자본주의의 경쟁과 차별을 뚫고 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

해방이 되고 친일파 척결의 사회적 폭풍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노조의 파업과 투쟁도 견디어 냈다. 6.25전쟁 중에도 그들은 사병을 만들어 빨치산과 전투를 치르면서 그들 소유의 염전을 지켰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재벌그룹으로 존재한다. 정경유착으로 법정에 선 적도 없고 스캔들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명가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나는 그 집안을 가장 가까이서 속속들이 들여다 본 외부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집안의 선대 회장들을 생존 시 만났었다. 그 집안에 내려오는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관련된 사람들과 만나 얘기할 수 있었다. 부자인 그들의 시각과 가치관을 보았다. 어느새 나도 백발이 성성하고, 내가 만났던 그 집안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죽음 저쪽 무의식의 세계로 건너갔다. 내가 파악한 사실들을 그 집안의 자손들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

당당하게 자랑해야 할 것에도 오히려 시대 분위기에 위축되어 속으로만 은은히 분노를 태우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나는 그들을 관찰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서 단편적인 기록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왜 쓸까. 어떤 시각일까.

작가의 입장이 아니다. 변호사의 입장도 아니다. 이제는 집안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특정이념이나 학문적인 틀을 통해 보는 역사가 아니다. 그저 이 시대를 살아간 보통사람으로서 우연히 접한 한 집안의 조선말부터 현대까지의 삶을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글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그 중 한 광경을 소개해 본다.

2007년 봄께다. 나는 고교동기인 친구와 함께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고창 김씨가의 후손 중 한사람이었다. 그의 증조부가 조선말 갑부였던 신흥지주 김경중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그 아들이었던 김성수의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했다.

“대지주였던 증조부 소유의 땅이 얼마나 됐어?” 내가 물었다.

“이 고창과 장성 일대의 땅들이 대부분 우리 증조부의 소유였지. 수십개의 부락민들이 우리 집안의 소작인들이었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기오면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했어. 한번은 마을 근처 삼거리를 지나가는데 순경이 내가 탄 차를 세우는 거야. 나는 뭔지도 모르고 겁을 먹었지. 그런데 그 순경이 나를 보고 도련님이라고 하면서 경례를 붙이는 거야.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소작인이라고 하더라구. 그런 시절이 있었지. 70년대 중반쯤 세상이 달라졌어. 여기 오니까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더라구. 저수지 옆을 지나가다가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가 낚시를 하는 걸 봤어. 그 아이의 옆으로 다가가 구경을 하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와서 옆눈길로 나를 슬쩍 보더라구. 내가 누군지 뻔히 아는 눈치였어. 그 여자 역시 우리 집안의 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지. 나를 경계하고 싫어하는 눈빛이었어. 지주 출신에 대한 증오 비슷한 거지. 89년대는 이 지역 부락민들이 아예 떼지어 서울로 올라와서 땅을 자기들에게 무상분배하라고 시위를 벌였어. 이미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농토를 다 내주고 우리 집안에서 간척한 땅이 예외가 되어 남아 있었거든. 그 무렵 큰아버님이 국무총리였고 친척 형님이 동아일보 회장이었지. 그때 거의 거저 주다시피 그 사람들에게 땅을 넘겼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많은 부분의 땅이 뒤에서 시위를 조종한 좌파단체쪽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고 하더라구.”

노동자 농민에게만 분노가 있는 게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분노가 있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