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110년 전 중학생 ‘송진우’의 통찰

젊은 시절 송진우(오른쪽) 김성수(왼쪽)

나는 변호사를 해오면서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지 않았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같은 사실이라도 그것을 보는 시각과 마음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물건이 없어지고 이웃의 청년이 훔쳐 갔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이웃 청년이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도둑같이 보일 수 있다. 다행히 진범이 잡히면 그런 시각이 바뀔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이웃집 청년은 영원한 도둑으로 마음 속에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선입견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나는 변호사를 하면서 경찰이나 검찰의 검증조서를 믿지 않고 범죄현장을 직접 확인하곤 했다. 또 경찰이나 검찰의 조서를 믿지 않고 진술을 했다는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나 확인하곤 했다. 그게 내가 변호사로서 형사사건을 대했던 태도였다. 법정에 오른 역사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정사관을 가진 역사학자나 친일 반민족 행위를 심판하는 위원회의 주장은 그들이 가진 스펙트럼으로 그 시대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원재료를 보고 내 나름대로 그 시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각과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구한말 고창 갑부 김경중의 아들이었던 김성수 김연수 형제를 중심으로 그들과 네트워크가 연결된 인물들을 추적했다. 한일합방 전 일본 중학교에 유학을 간 홍명희가 아버지 친구인 고창 갑부 김경중의 아들인 김성수 형제에게 문명의 자극을 전했다. <임꺽정>이라는 작품을 쓴 홍명희는 후일 북한의 부수상이 된다. 김성수는 홍명희에게서 받은 자극을 친구인 송진우에게 얘기하고 함께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을 간다. 고창 갑부 김경중은 아들의 친구인 송진우의 일본유학 비용을 댔다. 1911년 전국의 자산가를 조사한 <시사신보>에 따르면 김경중은 재산 10만엔 이상의 한국자산가 32명 중에 들어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시절 송진우

송진우는 일제시대 민족의 존경을 받던 지도자다. 해방 무렵 일본 총독은 그에게 정권을 맡기려고 한 적이 있다. 송진우는 해방정국에서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초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본다. 송진우는 일본 중학에 입학한 1년 후 친구인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를 그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일본으로 데려가 중학교에 입학을 시킨다.

김연수는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의 재벌이 됐고 그가 일군 삼양사그룹은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오늘은 중학생 송진우가 친구의 동생 김연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면서 그를 깨우치는 과정을 소개해 본다.

1910년 12월 8일경 고창으로 돌아온 중학생 송진우는 친구의 동생인 김연수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홍명희와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홍명희가 나하고 성수에게 동경을 안내해 주는데 입이 쩍 벌어지는 거야. 우리와 너무 차이가 나니까. 일본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건 우리보다 20년밖에 앞서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너무 크단 말이야. 우리들은 모두 압도당하고 풀이죽었어. 우리보다 먼저 유학을 온 최린이나 허헌이 유학생 조직을 만들어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뜻을 본국정부와 국민들에게 알리려고 했어. 일본 경찰이 그 사실을 알고 유학생 단체를 해산해 버렸지. 그 뒤로 한국인 학생 두세명만 모여도 일본 순사가 감시를 하는 거야. 조선에서는 합방이 되면 대접받는 일본 시민이 되는 줄 착각하기도 하지만 절대 그게 아냐. 망국(亡國)이란 단순히 국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로 굴러 떨어지는 거야. 세계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 국민들을 끌어다 노예로 사용하잖아?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더욱 분발해야 해. 그것만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 지난해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지. 우리는 안중근을 의사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더구만. 일본 놈들은 깡패를 동원해서 우리 궁중으로 들어가 국모를 살해했으면서 말이야.”

송진우

나는 자료를 통해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소년 송진우를 보면서 감탄했다. 송진우는 그 얼마 후 친구의 동생인 김연수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서 관부연락선에 오른다. 관부연락선이 처음 취항한 것은 1905년 9월10일이었다. 최초 연락선의 이름은 이키마루, 1681톤의 배였다. 이어서 11월 1일 1679톤 짜리 쓰시마 마루가 취항해 매일 한 번씩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갔다. 그 배의 선창에는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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