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조선 소년이 본 1911년 일본풍경

1911년 일본 도쿄의 마루노우치 거리 <사진 National Diet Library>

오늘은 일제시대 초기 일본의 중학교에 입학하러 가는 한 소년의 눈과 귀에 들어온 광경을 전하고 싶다. 고창 출신 소년 김연수가 동경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형 김성수를 찾아가는 과정의 자료를 소개한다.

1911년 1월 30일경 열다섯 살 소년 김연수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해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후 동경행 열차에 올랐다. 서른두 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길이었다.

처음 기차를 타본 소년 김연수는 차창 밖을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놀랐다. 무성한 숲이 끝도 없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가 살았던 조선의 산하는 벌거벗은 민둥산이었다. 오오사카 부근의 공업지대를 지날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거대한 공장의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앞서가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으로 먼저 유학 온 형 김성수가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소총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죽창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이 얼마나 한심하냐는 것이었다. 길고 긴 기차여행 끝에 그는 동경의 신바시역에 도착했다. 인력거들이 역 앞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는 형 김성수의 하숙방에서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는 형이 부드러운 어조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가 있지. 그가 미국에 갔을 때 사람들에게 워싱턴 대통령의 후손들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어. 미국을 일으킨 워싱턴의 자손이라면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거지. 일본으로 치면 도쿠가와 이에야쓰쯤으로 여겼다고 할까. 그런데 미국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더래. 워싱턴의 자손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는 거지. 일본인이나 조선인들은 미국이 공화국이고 대통령은 4년마다 교체하는 민주국가인데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우리는 그런 민주국가를 이해해야 해. 지난해 한일합방이 되고 대한제국은 이제 없어졌지. 통탄이나 비분강개로 나라가 되찾아지는 건 아니야. 뜻만 가지고 어떻게 되는 세상도 아니고. 힘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힘은 이제부터의 배움에서 나오는 거야.”

그의 형은 타고난 선생 기질이었다. 형제는 그 무렵의 동경시내를 구경하고 다녔다. 벚나무와 단풍나무 가로수가 이어진 긴자거리에는 둥근 화강암 돌기둥과 붉은 벽돌이 어우러진 중후한 분위기의 유럽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백화점들도 보였다. 미스코시백화점은 르네상스식으로 지었다는 화려한 대형건물이었다. 출입구 주변에는 중후한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홀은 1층에서 5층까지 중앙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그 주위로 휘어지는 매끈한 대리석 계단이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들이 내부를 더욱 고급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식료품에서 화장품 잡화 등 없는 게 없었다. 고급의 수입상품도 있었다. 그 백화점의 물품을 조선 왕실에 납품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2층에서 악대들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분위기를 돋구었다. 진열대 위에는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백화점 안을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형 김성수가 동생 연수에게 말했다.

“1853년 미국이 대포로 일본의 문을 강제로 열었지. 일본이 처음으로 미국의 증기선을 본 해이기도 하지. 일본인 들은 그 2년 후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항해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5년 후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증기선을 조작해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어. 태평양 항해 중 일본인은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 측량도 일본인들의 손으로 했지. 러시아의 피오트르대제가 네덜란드에 가서 항해술을 배웠어도 일본보다 못한 셈이었어. 일본은 서양기술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 글자를 공부했지. 그들의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야. 지금도 나가사키에 있는 외국인 서점에서 사전을 사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영어 공부를 해. 서양 책자에 있는 그림들을 베껴서 그대로 만들어 보고 실험을 하면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어.”

동생 김연수는 기차를 타고 오다가 본 오오사카의 공업지대와 동경의 백화점에 있는 물품들을 보면서 장래 사업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그는 눈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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