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에 오른 이하영의 경우

이하영(1858년 8월 15일~1929년 2월 27일, 음력)

“정치적 시각에서 작위를 받은 그를 친일파로 단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시각에서 그를 보면 어떨까. 몇 십년이 흐른 후 역사를 재단하는 표준 잣대가 변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민주화 투쟁이 심하던 1980년대 법정은 더러 난장판이었다. 방청석에서 운동권 노래가 울려 퍼지고 피고인들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서 판사에게 날렸다. 내가 아는 판사는 법정에 들어가면 언제 고무신이 날아올 지 살피고 재빨리 도망갈 궁리부터 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법정 한 가운데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뒤집혀 있는 고무신을 본 적이 있었다.

고무신은 내게는 아련한 추억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강원도 홍천의 시골길을 걸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투명한 햇빛이 내려 쬐는 산길을 한없이 또박또박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신고 있던 하얀 고무신이 지금도 기억의 갈피에 그대로 남아있다.

대학시절 절에서 공부할 때 선방 앞 댓돌 위에 깨끗하게 닦인 하얀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있는 걸 보면서 수도승의 소박함과 정결함을 느꼈다.

고무신은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상업적 성공의 사례가 아닐까. 아직 사람들이 짚신을 많이 신고 다닐 때였다. 짚신은 너무 빨리 닳고 볏짚으로 만들어진 탓에 며칠 가지 않았다. 일본에서 수입되는 ‘호모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구두모양에 바닥을 고무창으로 했다.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경이로운 신문물이었다.

당시 일본 신발의 행상을 하던 이병두라는 한국인이 남자 고무신은 짚신모양으로 여자 고무신은 앞머리가 볼록하게 솟아 오르게 만들었다. 폭이 좁고 굽이 높으며 발등을 덮는 일본의 신발과는 달리 우리 발에 맞도록 폭은 넓히고 굽을 낮추고 발등을 드러낸 ‘조선식 고무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고무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공장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영세업자들까지 뛰어들어 2백여개 공장이 난립하는 최대의 경쟁업종이었다.

조선에서 고무신의 수요가 폭발하자 일본의 고베항 부근에도 110개의 고무신공장이 설립됐다.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에는 고베에서 온 고무신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고무신업계의 선두 주자는 구한말 외부대신이었던 이하영이 경영하는 ‘대륙고무주식회사’였다. 이하영은 특이한 인생역정을 겪은 사람이었다. 1858년 동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통도사 동자승 노릇도 하고 동래장에서 찹살떡 장사를 했다. 그는 일본 가게의 점원을 하면서 스무일곱 살 무렵인 1884년 장사를 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갔다가 돌아오는 배 안에서 조선에 오는 선교사인 미국의사 알렌을 우연히 만나 알렌의 요리사가 된다. 그가 알렌의 요리사가 된지 몇 달 안돼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알렌은 중상을 입은 당시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하게 된다.

몇달 배운 영어실력으로 이하영은 조선 최초의 통역이 되어 알렌과 함께 궁전으로 들어갔다. 당시 궁전은 관복을 입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졸지에 주사라는 말단 벼슬을 받게 됐다.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그는 구한말 최초로 미국 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 일행에 끼어 2등서기관 자격으로 워싱턴으로 가게 된다. 청나라 대사가 당시 조선은 청나라 속국으로 외교권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박정양이 소환되고 혼자 남은 이하영은 졸지에 서리공사가 됐다. 당시 그는 고종에게 엉뚱한 제안서를 보낸다.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를 담보로 미국정부로부터 2백만 달러를 빌려서 그 돈으로 미국 군인 20만명을 조선으로 끌어오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 미국 군인들을 활용해서 조선 땅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까지 점령하자고 했다. 그는 고종에게 중국을 점령해서 심양까지 다스리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했다. 황당한 얘기였지만 그는 고종의 마음을 잡았다. 고종은 그후 귀국한 그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했다. 친미파였던 그는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바람에 을사오적에서 빠졌다. 한일합방 당시에 그는 친러파였다. 친일 매국노의 정식 비난을 비껴갔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회유책으로 그에게 작위와 중추원고문이라는 직위를 내렸다.

원래 상인이 되고 싶었던 그에게 일본의 자본주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그는 ‘대륙고무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귀족마케팅에 나섰다. 그가 <동아일보>에 낸 고무신 광고를 보면 이랬다.

‘제가 제조한 고무신을 전하도, 왕자 공주님들도 나인들도 애용하시어 이번에 주식회사로 출범하게 됐습니다. 저는 조선 고무업계의 원조로서 앞으로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할 예정이오니 저희 회사의 제품을 애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한 제품을 저의 회사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도 많으니 본사의 상표 ‘대륙’에 주의하시옵소서.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 이하영’

그의 귀족마케팅은 성공했다. 대륙고무신은 인지도와 함께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시장을 석권했다.

그는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서대문 밖에 한옥와 양옥을 절충한 아흔아홉 칸의 저택을 짓고 살았다. 대지 1500평인 집안에는 인공동산까지 만든 조선인 부자의 상징이었다. 그의 손자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씨다.

백년쯤 후인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 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올렸다. 후일의 역사가 내린 평가였다. 정치적 시각에서 작위를 받은 그를 친일파로 단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시각에서 그를 보면 어떨까. 몇 십년이 흐른 후 역사를 재단하는 표준 잣대가 변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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