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강남역 ‘공시생’과 500년 전 ‘과거준비생’
서울로 올라와 밤의 강남역 네거리를 산책했다. 강렬한 비트의 락 음악이 폭포같이 쏟아지는 속에서 젊은이들이 거리의 탁자에서 맥주잔을 부딪치고 있다. 허공에는 음표와 말들이 부딪치며 들끓고 있었다. 한적한 바닷가에는 없는, 도시와 젊음의 열기였다.
다리가 아파진 나는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보이는 도너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요거트와 꽈배기 도너츠 한개를 주문해 받아가지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옆에 젊은 여성이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 앞의 노트북 화면에는 ‘재산세법강의’라는 자막이 떠있다. 그녀는 문제집 같아 보이는 책을 들여다 보면서 그 안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요즈음은 스타벅스같은 깔끔한 카페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것 같다.
대학 시절 나는 책 보따리를 싸들고 고시원이나 철 지난 강가의 방가로 그리고 산속 깊은 곳의 절이나 암자들을 돌아다녔다. 고시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지금으로 치면 세달 살아보기를 한 셈이라고 할까. 해금강 절벽 위로 치솟아 오르는 하얀 겨울파도나 얼어붙은 북한강의 저녁모습 등 그때 내가 본 낭만적인 풍경들이 추억의 사진첩 속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다.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스친 광경과 감정들이 늙어보니까 더 소중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읽었던 조선시대 중기의 하서 김인후 선생의 일기에도 과거 준비생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는 다시 오백년의 세월 저쪽에 있는 하서 선생을 그의 일기 속에서 불러내어 영적대화를 시도한다.
‘내가 대학 3학년때 수천명 중 400명 가량 합격하는 고시 1차에 합격하니까 아버지가 우리 아들이 진사가 됐다고 좋아하셨죠. 하서 선생의 과거 합격기를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나는 오백년전의 공시생 모습이 궁금했다. 일기 속에서 하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도 엄 변호사 같이 스물두 살 때 과거의 1차시험인 진사시험에 합격했소. 화담 서경덕도 같이 합격했소. 전국적으로 250명을 뽑는데 운이 좋은 셈이었지. 우스운 얘기지만 그때 나의 장인 어른도 백발의 나이에 합격하셨소. 진사 동기시지. 1차에 합격한 나는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성균관에 들어갔소. 그곳은 2차 시험 준비를 하는 특별 고시원 비슷했소. 그때부터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타향살이가 9년이나 계속됐소. 엄 변호사 시대 윤석렬 대통령도 고시에 9년만에 합격하지 않았소. 그런 경우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많은 법이요. 변명한다면 사람을 좋아하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할까. 나 역시 성균관에서 과거 2차시험을 준비하는 기간 사귄 사람들이 많았소. 서경덕과 이퇴계 두 사람과는 특히 친했소.’
‘제 경우는 고시에 세월을 보내면서 외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하서 선생은 어떠셨습니까?’
‘성균관 생활이 10년쯤 됐을 때요. 설날에도 혼자 남아 처량하게 지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오. 과거에는 자꾸 떨어지고 추운 방에 홀로 앉아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았소.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게 받아들여야 할 만큼 대단한 가치가 벼슬에 있는지 의문이었소. 1535년의 일이었소. 건강도 좋지 않고 자꾸 과거에 낙방하기에 짐을 싸서 고향집으로 돌아갔소. 그렇게 고향에 갔지만 마땅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했소. 선비가 과거가 아니면 고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란 말이오.
이듬해 여름 다시 성균관으로 복귀했소. 내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엄 변호사시대가 사용하는 서기로는 1543년 시월에 시행되는 과거를 치렀소. 시험문제는 성리학의 연원을 밝힌 다음 주자와 학문적 경향이 같은 이와 다른 이를 구별해서 논하라는 것이었소. 오늘날의 논술문제와 비슷할 거요. 내가 외우고 있던 평이한 문제였지. 그때 나는 합격했소. 당시 문과에 급제하는 비율은 선비 300명 중 1명 꼴이었소. 그때 퇴계도 나와 같이 합격했고 둘 다 같이 홍문관으로 발령이 났소. 그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인사이동이 되어 가는 바람에 헤어졌소. 많이 섭섭했지.’
‘시인이 관리가 되셨는데 할 만 했습니까?’
‘말도 마시오.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소. 그 얘기는 다음에 하리다.’
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은 크게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