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조선 선비 김인후의 문학일기

하서 김인후

호남의 명가 김성수씨 집안의 소송을 하다가 우연히 그 집안의 귀한 자료를 읽게 됐다. 그 집안의 조상중 한 분은 열여섯살부터 마흔한살까지 25년간 매일 일기를 썼다.

나는 책을 통해 수많은 죽은 사람들과 만났다. 책이란 죽은 영혼과의 대화라는 생각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도 한다. 내가 물으면 하나님은 내 마음을 움직여 특정의 글자들을 보게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일반의 책들도 읽는다. 내가 물으면 그 영혼들은 책 속의 특정 글자들에 내 시선이 가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나는 자료 속에서 조선조를 살았던 시인 김인후와 영의 대화를 시작했다.

‘실례지만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마음으로 물었다. 조용하던 자료 속에서 어떤 영의 소리가 작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 말이요? 생의 대부분을 초야에 묻혀 살았던 시골 선비요. 정승 판서 같은 큰 벼슬은 쳐다본 적도 없소. 아버지도 일찌감치 과거 공부에서 손을 떼신 분이오. 그런 집안이오.

그냥 시가 좋아 시를 평생 썼을 뿐이라고 할까.’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조선의 대단한 시인이시고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호남의 학자라던데 얘기해 주시죠.’

‘과찬이오만 말하리다. 나는 1510년 장성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소. 우리 집은 마을에서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초가집이었소.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뒷마당에는 대숲이 있고 식구들이 굶어죽지 않을 정도 약간의 논과 밭이 있었소. 나는 다섯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여섯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소. 시에 남다른 재질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소. 내가 열세살쯤 됐을 때요. 성인이 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인생이 설 수 없다고 하셨지. 나는 그걸 하늘이 내게 준 교훈이라고 생각하고 시 공부에 전념했소. 시경(詩經)을 천번 읽었소. 내가 평생 읽은 주자는 반복적인 독서를 강조하셨지. 다른 사람이 한번 읽어서 알면 나는 열번 읽는다, 다른 사람이 열번 읽어 알면 나는 천번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소.

나는 이백과 두보를 좋아했소. 그리고 초나라 시인 굴원이야말로 나의 시와 인격 형성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분이오. 아름다운 시를 읽고 외우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소. 내 평생에 가장 열중한 일은 시 쓰기였소. 내 속에서 열정이 끓어올랐다오. 꿈속에서 짓던 시를 잠에서 깨어 완성한 적도 있다오. 일상의 체험을 시라는 그릇에 담아내려고 노력했소. 나는 시문을 지을 때 평이한 말투와 간결한 문장을 좋아했소. 까다롭거나 화려한 수사로 잘난 척 하는 걸 싫어했지. 시경 외에도 나는 고금의 서책에서 좋은 싯귀들을 모아 그걸 공부했소. 그런 건 시를 쓰기 위해 연장을 벼리는 일이고 본질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열린 마음이라고 생각했소.’

‘시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으셨습니까?’

‘열아홉살때 나는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에 응시했소. 그건 과거 하고는 다른 거요. 요즈음으로 치면 신춘문예라고 할까. 거기서 사랑의 애달픔을 담은 시를 지었지. 그게 요즈음 말로 치면 히트한 거요. 장안의 명기들이 앞다투어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했소. 그 노래로 나는 유명해졌지. 시란 인간과 세상의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찰과 탐구가 아닌가 하오. 내가 살던 시절 곳곳에 시인이 있었소. 정철이나 기대승 고경명과 시회를 가지기도 했소. 화담 서경덕은 박연폭포에 가서 지은 시를 가져와 내게 운을 맞춰 달라고도 했지. 우리들 선비의 문학을 기예의 협소한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오.’

‘퇴계와의 인연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살던 시대 소위 양반계급의 자식이면 과거를 봐야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소. 한정된 직업이었지.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물건을 만들 수도 없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소. 나는 하는 수 없이 봇짐을 싸들고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 머물렀다오. 당시 성균관은 과거 2차시험을 준비하는 현대의 고시원 비슷한 곳이었소.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어느 새 9년이 흘렀소. 그렇게 한심하게 지내던 겨울 싸락눈이 뿌리던 어느 날이었다오. 한 훤칠한 청년이 술병을 들고 내 방 앞에 와서 나를 불렀소. 그 사람이 퇴계였소. 세상 쾌락은 모두 저버린듯한 얼굴의 그와 죽이 맞아 친해졌소. 그게 우리들의 관계요.’

자료 속에서 만난 조선의 시인의 말이 내 가슴속으로 시원한 샘물이 되어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필암서원. 전남 장성을 대표하는 유림 유산이자 호남 유일 사액서원인 필암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온전함을 유지했다. 호남 유림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고자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590년 창건해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됐으나 1624년 복원해 1672년 지금 위치로 옮겨 세웠다.

One comment

  1. 필자는 성균관대 출신입니다. 지켜야 될 자격과 전통이 있다면, 국가주권, 헌법,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등에 의거하여, 최고의 가치로 알고 지켜가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성균관대는, 해방후, 미군정이 공자묘경학원을 성균관으로 개칭(성균관 복구에 해당)하는 법률을 발효, 전국 유림대회 결의(고문:이승만,김구, 위원장: 김창숙)에 따라,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선생이,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환원(복구)을 실행하는 성균관대를 등록(성균관은 제사기구로 이원화)하여,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승계대학으로, 미군정때부터의 국사 성균관 교육으로, 해마다, 학교에서 성균관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광복 당시 국내에 있던 일본의 모든 공유 및 사유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규정되어 미군정청의 ‘귀속재산’으로 접수되었다…*출처:귀속재산불하[ 歸屬財産拂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의견:해방후 미군정당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국립대로 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의 敵인 일본잔재 경성제대를 적산재산 국유화 하는 패전국 잔재처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대뒤에 붙여넣은 더 자격없는 신생 대학들이, 국립대 서울대를 가장 앞에 두고, 주권.자격.학벌없이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대항해 온것은, 인정해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일제 잔재 공립 중.고교들이, 구한말에 세워진 한국의 민족학교들보다 좋다고 주장하는것도 적국 잔재 일본 왜구학교로서는, 아무 법적 타당성이 없고,명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오도하고, 일본 불교에서 파생된 신도(불교 후발 일본 국지적 신앙으로, 일본 국교), 불교, 기독교만 종교로 하여, 강제 포교한 것도, 미군정당시부터 무효가 된 것입니다. 한가지 주의할것은, 서유럽에서 왕족.귀족의 역사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기반에서 형성된 서강대가 속한, 가톨릭 예수회는, 해방후 미군정을 거친 한참후에 들어와 한국에 그 교당이나 신자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중을 위한다는, 가톨릭 외방전교회가 들어와 활동했는데, 수천년 왕조국가 전통의 한국에서는 지배층의 성균관대와 성균관.양반들이 인정할 수 없던 계파였습니다.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 宮(泮宮,學宮, 太學)의 별칭가진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가진 성균관대임. Royal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양반 성대 다음 가톨릭계 귀족대학으로,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이 뒤로 서울대를 극복하지 못해온 전국 각지역 대학들. 해방당시 미군정부터, 상위법은 승전국 국가원수들이 모여 발표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이 국제법으로 상위법 역할을 하고, 미군정령은 하위법이라, 상위법 우선의 원칙으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조선.대한제국에는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하나밖에 없던 나라였음.

    https://blog.naver.com/macmaca/22342409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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