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500년 전 김인후는 최태원-노소영 재판 어떻게 볼까?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2024년 4월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딸인 노소영씨와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이혼소송 뉴스가 ‘세기의 재판’으로 떠오르고 있다. 법원은 최대원 회장이 노소영씨에게 재산분할 금액으로 1조3808원을 그리고 위자료로 20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재벌가의 재산형성에 기여한 점을 참작했다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사돈이 되는 SK그룹에 ‘황금알을 낳은 거위’라는 이동통신권을 가게 했다. 그리고 수천억에 해당하는 대통령 비자금을 맡겼다. 법원이 그런 점들을 참작했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몇 명의 법조 원로들과 점심을 먹을 때였다. 오랜 세월 법관을 지낸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법원이 장물도 재산분할을 해주나? 대통령이 뇌물로 먹은 돈을 그 딸에게 주라니.”

모임에 나온 원로 법조인은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 방에서 재벌들에게 직접 뇌물을 받았어도 그 밑에서 일하던 비서실장과 검찰총장은 요즈음 정말 힘들게 살아요. 친구가 보자고 해도 밥을 사 먹을 돈이 없대. 대통령이 수천억을 만들 때 그 밑에 있으면서 단 한 푼도 먹지 않았다는 거지. 한 자리 한 사람들 나중에 하는 생활을 보면 청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얼마 전에 행안부 장관을 지냈던 친구가 한 이런 말이 떠올랐다.

“내무부 장관 출신들 모임에 갔었어. 어떤 사람은 장관을 그만둔 지 10년 20년이 넘었는데도 비서에 기사를 두고 부인이나 자식들도 풍족하게 돈을 쓰고 사는 거야. 장관을 할 때 뇌물을 많이 먹어둔 거지. 얼마 전에 내가 붐비는 지하철에서 데리고 있던 공무원을 만났어. 어떻게 장관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나 하는 눈빛이더라구.”

장관 출신인 그 친구는 청렴하고 소박했다. 장관을 마친 후 나와 남대문시장에서 나와 호떡을 사먹기도 했다.

나는 요즈음 오백년 전 한 선비의 일기장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운다. 오늘도 그 선비의 일기장을 보면서 그와 영혼 대화를 해보고 있다.

하서 김인후 선생

‘윤석열 대통령처럼 9수 끝에 과거에 합격하고 나서 관리가 됐는데 그 생활이 어땠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물었다.

‘시강원에 발령이 나서 자주 숙직을 했소. 다음 왕이 되실 인종이 세자이셨는데 내게 자주 오셔서 글에 관한 얘기를 나누셨지. 우리는 자연히 친하게 됐소. 한번은 세자께서 같이 작품을 만들자고 하셨소. 하얀 비단 위에 세자는 대나무를 그리고 나는 그 옆에 시를 썼소. 세자와 나는 그렇게 예술을 매개로 친해졌지. 세자가 후에 인종이 되셨고 내가 모시던 임금은 중종이셨지. 나는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게 대의고 성리학적 이상이었소. 중종 임금에게 조광조의 처벌이 부당하니까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 말을 하니까 여러 선비들이 나를 따라 조광조의 복권운동에 나섰소. 조광조를 처벌한 당사자인 중종에게 그게 틀리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소.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소. 중종 임금은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계시는 것으로 나를 구하셨지. 중종이 승하하시고 나와 친하던 세자가 인종이 되셨소.

인종의 건강이 나빠지자 계모인 문정왕후가 권력에 탐을 내고 그를 따르는 세력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소. 내가 임금의 약재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으니까. 궁궐이란 정치적 음모와 계략이 심한 곳이었소. 나는 사직서를 내고 관리 생활을 청산했소. 벼슬을 하지 않으면 가난이 뒤따랐지만 그건 내가 좋아하는 시와 함께 사는데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겠소? 조정에 있는 기간이 억압, 부자유, 불안이라면 낙향하는 길은 해방, 자유, 사랑이었다오.

고향에 아담한 초가집을 지어놓고 맑은 물로 빚은 술을 마시며 자연을 노래했소. 텃밭에서 딴 채소를 이웃과 나누어 먹었소. 나는 정원에 취미를 가졌었소. 야생 난초를 찾아 산과 들을 종일 헤매기도 하고 기이한 모양의 돌과 이끼를 채집하기도 했지. 그렇게 살면서 사실 나는 마음공부를 했소. 나뿐 아니라 퇴계 율곡도 마찬가지였지. 주역을 포함한 경전을 읽고 또 읽었소. 나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빠져들기도 했소. 독학으로 성리철학의 묘미를 봤다고 할까. 신비체험도 겪었소. 나에게 하늘이 인격신으로 다가온 적이 있소. 하늘에서 항상 나를 살피시는 이가 있는 걸 느꼈다오.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깨달았소.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야 할 것 같았지. 꿈에서 본 글로 계시를 받은 적도 있소. 나는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중하다는 걸 알았소.’

‘참 그 시절 몇 년 한양에 계실 때 다른 관리들과는 달리 집도 혼자 따로 짓고 사셨던데 왜 그랬습니까?’

‘엄 변호사가 사는 현대에도 강남의 부촌에 산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지 않소? 내가 살던 시대에도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북촌에 기와집을 얻어 살려고 했소. 나는 그런 게 마땅치 않았지. 어느날 나는 몇달치 녹봉으로 받은 엽전 꾸러미를 들고 동대문을 빠져나가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땅을 발견했지. 땅이 그윽하면서도 트이고 산은 빼어나면서도 고왔소. 물이 골짜기로부터 흘러와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연못이 되기도 했지. 그 땅을 사서 덤불을 베어내고 나뭇가지를 잘라낸 후 작고 아담한 집을 지었소. 나는 그 집을 평천장(平泉莊)이라고 이름 짓고 벽에 소원을 썼소. 내가 죽은 후에도 후손이 그 터를 지키며 진실하고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이오. 조상이 기원하면 하늘에서 더러 들어주기도 하는 것 같소. 내가 죽은 400여년 후에 후손이 내가 살던 집터와 그 일대를 사들여 대학을 세웠소. 그게 고려대학교요. 그리고 나의 후손이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 젊은이들을 선하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쳤소.’

그 시절 하서라는 선비에게서 나는 참된 인간의 원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후손인 고창김씨가의 소송을 맡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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