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노년에 다가온 친구…”하나님의 선물일 터”
그제 저녁 서초동 이면도로의 빌딩 지하에 있는 국수집에서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를 보기 위해 동해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고교 시절 문예반 대표인 그는 이미 문단에서 기성작가 같은 위치에 있던 것 같다.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할까. 그의 고교동기인 천재 소설가 이인성 같이 될 걸로 믿었다.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가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자기의 버킷리스트에 죽기 전 밥을 사줄 사람으로 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감사했었다. 나는 남에게 호의를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이 뾰족하고 거칠어 남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어도 그와 속을 털어놓은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었다. 대학시절 모임에서 몇번 얼굴을 마주 대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를 도도하게 보는 삐닥한 시각이었다.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잘 얻어먹었다. 암이라도 걸려서 그랬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그는 죽지 않았다. 내가 되갚아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시간이 흘렀다. 게으르고 무심한 내 성격 탓이었다. 며칠 전 그가 동해 바닷가에 사는 내게 다시 전화를 했었다.
20년이란 세월에 그는 많이 풍화된 것 같았다. 머리가 빠지고 듬성듬성한 백발이 윤기 없이 머리에 뭉쳐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파전을 안주로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우리는 50년 전 과거의 페이지부터 펼치고 그 의미를 다시 나누었다. 대학의 어느 시점부터 우리의 인생행로는 달라졌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법대에 입학했는데 박정희의 10월유신이 발표된 거야. 권력에 아부하는 법대 교수들이 쓴 유신헌법을 도저히 못보겠더라구. 그건 이미 헌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고시를 포기했지. 데모를 하다가 잘렸는데 바로 영장이 나오고 최전방 군대에 졸병으로 끌려갔지.”
유신을 발표하는 방송이 나올 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역사 선생의 씁쓸해하던 표정이 기억의 깊은 바닥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때 대학 1학년이던 그 선배는 개결한 양심에 사회의식에 일찍 눈을 뜬 것 같았다.
내가 대학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도서관에서 유신헌법을 펼쳐놓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눈동자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나는 저항할 용기가 없었다. 모래 한 알로 성벽을 치는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밟히며 도망하며 숨어서 살아왔다. 나는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어땠을까. 1년 위였던 그 선배가 갑자기 없어진 그때 자기의 고통을 얘기했다.
“군대에 갔더니 함께 생활하는 내무반 사병들이 전부 고등학교 졸업 학력이더라구. 내무반장이 하는 말이 너 대학에서 데모하다가 잡혀온 놈인 걸 우리가 다 안다고 하면서 고통을 주더라구. 매일 손발 씻을 물을 가져다 바치고 엄청나게 많이 얻어맞았어.”
그게 우리가 공유한 세월이기도 했다. 데모를 하다가 군에 간 또 다른 친구는 칼바람 부는 연병장에서 벌거벗긴 채 찬 물을 뒤집어 쓰고 서있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기합을 주는 하사관이 똥을 먹으면 막사로 들여보내 준다고 해서 숟가락으로 똥을 퍼서 얼른 먹었다고 했다. 대학생이라는 자체가 그 누군가에게는 극도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장교로 군대에 갔던 나도 냄새나는 남의 양말을 입에 물고 정강이를 구두발로 채이기도 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기업에 들어갔지. 일을 할 때 회사 안에서 걸어 다닌 적이 없어. 항상 뛰어다녔지. 그 다음에는 영업을 하느라고 세계를 다녔어. ‘배를 만들어 드립니다. 우리 회사에 수주하세요’ 그게 나의 일이었어. 요령이 생기니까 어느 나라의 누가 배를 만들어달라고 할지 알겠더라구. 배 칠십 척을 수주한 적도 있어. 공항에 들어올 때 가방 속 맨 위에 선박수주 계약서를 얹어 놓고 있으면 세관공무원이 그걸 보고 수고하셨다면서 프리패스를 시키더라구. 그게 우리의 산업화시대 아니었나?”
“1만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장자리에 오르니까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어. 배를 만들 때 선박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서 하청을 주는 시스템이야. 하청 받은 기업에서 작업상 필요해서 크레인을 사용하려면 노조에 뒷돈을 줘야 하더라구. 노동자가 노동자를 뜯는 세상인 거지. 제일 불쌍한 인생이 하청받은 업체의 외국인 노동자들이야. 식당에서도 엄격한 차별이 있어. 가장 좋은 안쪽은 원청회사의 직원이 안고, 먼지가 나고 더러운 가장 바깥쪽은 외국인 노동자야. 노동자끼리도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더라구.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노조의 영향력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입사했던 1970년대는 일선의 노동자들까지 모두 그룹 이름을 수놓은 졈퍼를 입고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하면서 마음을 모았는데 지금은 입고 있는 졈퍼의 회사명들이 모두 달라. 차별을 없애고 싶었는데 사장의 힘으로는 안되더라구.”
내가 모르는 세상이었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제는 조용히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이제 남은 여생을 소설을 쓰고 싶어. 나는 회사원으로 있으면서도 나의 정체성이 글쟁이라는 걸 잊지 않았어.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했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는 방문을 꼭 닫아걸고 책을 읽고 글을 썼지.”
그의 인생은 양심적 엘리트의 모범적인 삶이 아닐까. 도도히 흐르는 진흙탕물의 세상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노년의 포구까지 운 좋게 항해를 해 온 것 같다. 그는 작품도 진흙탕에서 핀 연꽃 같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를 보면서 노년의 좋은 친구가 내게 다가온 것 같았다.
내가 인위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내게 좋은 친구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간수장의 마음을 움직여 감옥에 갇힌 요셉을 좋게 보도록 만들었다. 신비한 섭리다.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내게 친구가 되게 하셨다.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