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어느 도박꾼 아내의 속 깊은 남편 이야기

“부도를 맞고 큰 돈을 떼었습니다. 내게 빚진 사람들을 보면 고급 외제차를 몰고 쓸 돈 다 쓰면서 내 돈은 갚지 않아요. 안 주려고 하면 사실 제가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정 사정을 하면 1년에 아주 조금 돈을 주기도 합니다.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래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습니다. 참고 더 잘해주죠. 그게 제가 돈을 받는 방법입니다.”

 

겨울바람이 부는 구치소 앞 광장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높은 담 아래 붙어있는 작은 철문 쪽으로 몇몇 사람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이따금씩 내가 사건을 맡았던 인물들의 석방 장면을 보러 갔다. 감옥에 있을 때 누가 면회를 갔는지 그리고 석방될 때 누가 그를 맞이하러 왔는지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게 가족이고 친구이며 이웃이라는 생각이다.

그때 내가 맡았던 사건은 돈 있고 시간이 남아도는 부유한 여성들의 도박사건이었다. 도박판 뒤에서 불륜의 악취도 피어올랐다. 내가 두 여성의 변론을 맡았었다. 한 사람은 사회명사의 부인이고 이름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도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자랑했다. 죄의식도 약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좀 노는데 뭐 어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또 다른 여성은 시장에서 남편과 함께 성실하게 장사를 하다가 도박판 유혹에 빠진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남편들이 아내를 데릴러 감옥 앞에 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감옥 앞 광장에는 그들을 바로 다시 도박판으로 안내할 꾼들이 서성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찬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광장에 두 여성의 남편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철문이 열리면서 디자이너인 여성이 나왔다. 그 여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편을 찾는 눈치였다. 그러나 자랑하던 그녀의 남편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공허해 보였다. 

그때 광장의 한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또 다른 여성의 시장에서 장사한다는 남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내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아내의 불륜과 도박 그리고 감옥행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가 온 것이다.

“나는 아내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장사를 하면서 정말 힘들 때 아내는 어음할인을 해서 돈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리저리 뛰었습니다. 아내가 실수를 했다고 내가 등을 돌릴 수 없죠. 그리고 저기 기다리고 있는 도박꾼들 보세요. 아내와 같이 도박한 여성디자이너를 오늘 저녁 사우나에 모시고 가서 깨끗하게 씻기고 다시 도박판으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마약 중독범이 석방되는 날 마약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건네주는 존재들도 있었다. 도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번 그 거미줄에 얽히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한 여성은 다시 지옥으로 끌려가고 다른 한 여성은 남편에 의해 구원의 길로 가는 것 같았다. 그 부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 속에서 울리는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그 남편은 참 좋은 사람 같았다.

그 며칠 후 아내를 데리고 갔던 남자가 나의 법률사무실을 찾아왔다.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부도를 맞고 큰 돈을 떼었습니다. 내게 빚진 사람들을 보면 고급 외제차를 몰고 쓸 돈 다 쓰면서 내 돈은 갚지 않아요. 안 주려고 하면 사실 제가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정 사정을 하면 1년에 아주 조금 돈을 주기도 합니다.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래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습니다. 참고 더 잘해주죠. 그게 제가 돈을 받는 방법입니다.”

그의 말 속에 뭔가 깊은 게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되물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세상 누구한테도 돈을 떼이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발목에 사시미 칼을 차고 다녀요. 돈 받을 집에 가서 술 먹고 벌거벗고 드러눕는 사람이죠. 한번은 돈 받으러 가서 작심하고 드러누웠대요. 그런데 그 집 주부가 밥 때가 되니까 온갖 반찬으로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나오더라는 겁니다. 소주까지 반주로 곁들여서요. 그리고 밤이 되니까 비단금침을 깔아주며 주무시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악을 쓰면서 저항하는 사람은 다 당해냈는데 그 경우는 아뭇 소리 하지 못하고 그 집을 나왔대요. 나쁜 놈들도 자기 앞에서 딱 무릎꿇고 사정하면 마음이 약해지죠. 저도 그걸 보고 배웠어요. 내 돈을 떼먹은 사람은 뭐라고 탓하지 않고 더 열심히 잘해줘요. 그러면 몇 년 후 슬며시 돈을 갚기도 했습니다.”

나는 최고의 고수들이 쓰는 방법을 배운 느낌이었다. 성경은 누가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대주라고 한다. 뺨을 맞고 머리를 숙이고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른 쪽 뺨까지 돌려대 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기 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고 화내지 않으며 또 다시 같은 대우를 받을 각오를 하라는 뜻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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