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20년 전 고려대 법대 망년모임이 불쑥 떠올랐다

우리들의 모임은 맑은 강물을 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각자가 어려움이나 마음의 상처를 그 물에 담가 치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듣는 친구들은 그 상처에 공감하고 어루만져 주는 마음인 것 같았다. 고려대학의 모임은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끈끈하고 단결력 있는 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만에 만나도 학교 때 잘 모르는 경우도 그 모임에서는 강물같이 마음들이 흐르며 합쳐지는 것 같았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고려대 캠퍼스


20년 전 내 주변과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오십대 무렵 서초동의 한 식당에서 고려대학 법대 동창들이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망년 모임이 있었다. 한 사람씩 간단히 사는 근황을 얘기하고 남은 세월의 꿈을 말하기로 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부터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들어간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줄곧 법무팀에서만 일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꿈이 있다면 여행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소박한 꿈이었다. 대학시절 고시원에서 그와 같이 있었던 적이 있다. 그는 황소 같았다. 하루 열여덟 시간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실패는 방향을 돌리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회사원으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그 다음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저는 평생을 법률사무소 직원으로 일해 왔어요. 요즈음은 토요일 일요일을 산골에 있는 암자에서 보내고 있어요. 앞으로의 꿈이라고 하면 천수경을 암송하는 건데 통 외워지지가 않아요. 그리고 뒤늦게 결혼해서 서른 여덟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놈이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거예요.”

대학 시절 그의 해맑던 얼굴이 떠올랐다. 법서가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다니던 그는 돈 때문에 과외선생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인생 전반부를 마친 우리들의 꿈은 소박했다.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순번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전체 수석을 한 친구였다. 자그마한 기업을 경영해 왔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자랄 때 아버지를 싫어했어요. 사이가 나빴죠. 아버지가 너무 권위적이니까 거리감이 있었어요. 그런 아버지가 오십대 중반쯤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어요. 직장에서 나가달라는 메시지를 받은 거죠. 그때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서 처음으로 따뜻한 체온과 정이 통하는 걸 느꼈죠. 우리가 어느새 그런 나이가 됐네요.”

 오랫만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아팠던 일 못난 점들을 숨기거나 꾸미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들의 모임은 맑은 강물을 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각자가 어려움이나 마음의 상처를 그 물에 담가 치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듣는 친구들은 그 상처에 공감하고 어루만져 주는 마음인 것 같았다. 고려대학의 모임은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끈끈하고 단결력 있는 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만에 만나도 학교 때 잘 모르는 경우도 그 모임에서는 강물같이 마음들이 흐르며 합쳐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 같아 보이는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순서가 넘어갔다. 한 친구가 일어나 말했다.

“저는 고시에 늦게 붙는 바람에 아직도 평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남은 꿈이 있다면 그래도 좀 더 오래 검사를 하고 싶어요.”

그의 말이나 태도에서는 직업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원래가 겸손한 성품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과시나 위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은 얼마 전 경찰청장을 하던 친구였다. 동기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부탁해 달라고 먼저 말하고 다녔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요새 대통령 후보의 선거유세를 따라다니고 있어요. 정치를 해볼까 하고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는 거죠. 꿀 한방울에 모여드는 파리들같이 어떻게나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도무지 대통령 후보 옆에 설 틈이 없어. 그래도 내가 경찰청장을 지냈다고 대통령 후보를 경호하는 파견경찰관들이 슬쩍슬쩍 나를 도와주는 거야. 경호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떨쳐내고 나를 대통령 후보 옆에 슬쩍 밀어 붙여 주는 거야. 낮에 음식점에 갈 때도 그래요.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까 여러 식당을 세내서 밥을 먹는데 내가 대통령 후보와 같이 식당에 들어가면 경호팀 경찰관들이 ‘청장님 들어가셨다 셔터 내려라’하거든.”

모두들 ‘와아’ 하고 웃었다. 경찰청장을 했어도 어린 아이같은 표정이 되어 순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수명이 늘어 백세시대가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서로 얘기하며 앞날을 궁금해 했었다. 그 망년회가 있은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친구들 한명 한명의 삶이 각자 쓰는 한편의 소설이라고 비유할 때 지금 나는 그들이 쓴 소설의 후반부를 보고 있는 셈이다.

검사를 하던 친구는 검찰청 자기 사무실 책상 앞에서 조용히 죽어있는 걸 직원들이 발견했다고 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더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경찰청장을 했던 친구는 정치를 하려다가 그 뜨거운 불에 덴 것 같다. 권력이 지지하는 후보에 도전하려고 했다가 선거 이틀을 앞두고 구속이 됐다. 나는 그의 변호사였다. 담당검사는 나를 보고 자기는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정무’를 하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매일 상황을 검찰이 아닌 권력에 보고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함부로 정치의 옆에 가면 그렇게 화상을 입는 것 같았다. 석방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 망년회에서 본 친구 중에는 갑자기 쓰러져 몸이 마비되어 재활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들이 모여서 노년의 꿈을 얘기하던 20 전인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닐까. 삶에서 중요한 건 돈이나 자리가 아니었다.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시간과 건강이 아니었을까.

배터리의 마지막 한 눈금만큼 시간과 건강이 남아 있을 때 정말 중요한 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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