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사랑하는 내 아들아, 아빠 손 꼭 잡으렴”

그가 아픈 상처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애잔한 아픔이 내 가슴 속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의 인생은 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는 경비원을 하면서 아들의 미국 유학을 뒷바라지한다고 했다. 얼마 전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아버지의 못다 푼 한을 풀어준 것 같았다.(본문에서)

50대 중반 무렵이었다. 소년 시절,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이 40년만에 연락을 했다. 그냥 보고 싶다고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는 경기 중학생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전교 일등을 독차지한 천재였다. 그런 아이들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는 싸움도 잘해서 어떤 아이도 그의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그는 마음까지 넉넉했다. 나를 친동생같이 여기고 베풀어 주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의 집에 가서 몰래 나의 낡은 구두를 놓고 기도를 하고 온 적도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라는 주술같은 행위였다고 할까. 어머니의 기대는 애초에 욕심이었다. 나는 우수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래도 나를 경기중학교 시험을 치르게 했다. 나는 당연히 떨어졌다. 2차 시험에서도 떨어졌다. 그 시절은 모든 중학교를 일류부터 삼류까지 철저히 나누었다. 삼류학교의 뱃지를 달고 있으면 노골적으로 인간불량품 취급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는 부자집 아이들 외에는 재수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깨끗한 교복에 일류학교 뱃지를 단 아이들을 보면서 실패와 인간 실격을 체험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어두운 골짜기에서 혼자 헤매는 느낌이었다. 실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공부를 한 셈이라고 할까. 나는 다음 해에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우상이던 동네 형의 중학 후배가 됐다. 그는 중학교에서 나를 잘 돌보아주었다. 도서관의 좋은 자리를 잡아 내가 앉도록 해 주었다.

그 시절 입시는 산 넘어 산이었다. 고등학교 입시도 경쟁이 치열했다. 2차 중학교에 갔던 사람들이 패자부활전을 꿈꾸면서 중학교 3년 동안 공부의 칼을 갈았다.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동네 형은 고등학교 입시에서 떨어지고 2차 고등학교로 갔다. 아마 그도 나같은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진 상당수는 1년 후에 다시 시험을 쳐서 경기고등학교로 귀환하곤 했다. 그런데 그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와 40년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부천의 한 자그마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소년 시절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가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았다.

“변두리에서 오랫동안 옷 가게를 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집사람이 운영하고 나는 그저 셔터맨이죠. 아침에 가서 셔터를 열어주고 낮에는 술에 취해있다가 저녁이 되면 문을 잠그고 돈 통을 들고 오는 일이었죠.”

나는 그가 왜 취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부평에서 당구장을 하고 있어요. 밤낮없이 손님들이 오기 때문에 새벽 5시가 돼야 집에 가서 잠을 잘 수 있어요. 손님이 오면 물수건부터 음료수까지 가져다주며 서비스를 해요. 그래도 이 나이에 일이 있다는 게 이제는 감사해요. 다음달부터는 인천의 연안부두 경비 일을 맡게 됐어요. 뽑힌 게 행운이죠.”

그의 영혼은 이미 한 경지를 넘어선 것 같아 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보지 못했던 수십년의 세월이 단숨에 압축되어 없어진 느낌이었다.

“엄 변호사가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도 바람결에 전해듣고 신문에 쓴 칼럼도 봤어요. 방송에 나오는 장면도 보고 그래서 반가워서 전화를 걸었죠.”

그는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다 형 덕분입니다. 중학교 시절 사랑을 베풀어 주셨죠.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기억나는 게 있네. 엄 변호사가 경기중학교에 합격하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좋으셨나 봐. 같은 동네에 사는 나를 길에서 보시더니 학교에서 뱃지를 사다달라고 그러시는 거야. 나야 학교 매점에 가면 얼마든지 사니까. 사다 드리니까 신나게 받아서 가시더라구.”

아버지가 그랬다는 걸 나는 처음 들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다른 여자와 살았어. 돈 벌 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나는 버려진 셈이지. 학비를 타러 그 여자의 집에 가야 했는데 그게 정말 싫었어. 그 다음부터는 공부도 하기 싫어지더라구.”

그가 아픈 상처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애잔한 아픔이 내 가슴 속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의 인생은 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는 경비원을 하면서 아들의 미국 유학을 뒷바라지한다고 했다. 얼마 전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아버지의 못다 푼 한을 풀어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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