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시대의 의인’ 장기표 선생을 떠나보내며
장기표 선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다. 다만 막연히 훌륭한 분인 걸로 안다. 얼마 전 그에게 암이라는 하늘의 초청장이 갑자기 도달했다. 초청장을 받고 그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자연의 순환에 따른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성자 같은 태도다. 그가 보고 싶어하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을 지나칠 때가 있었다. 닭장 같은 봉제공장의 섬유먼지 속에서 얼굴이 하얗게 바랜 공원들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곳에서 살 수 있나 생각했었다. 짐승도 그렇게 키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청계천 봉제공장의 재단사이던 전태일이 세상에 절규하는 분신이 있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그 아픔에 공감하고 분노했다.
시대의 모순을 외친 대학생들에게 국사범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 시절 길거리의 벽에 붙어있던 이철, 유인태 등의 지명수배 전단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들의 시대를 읽는 눈과 강한 의지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아 보였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장기표 선생의 경우 9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12년간 수배받고 도피하는 생활을 했다. 서울 법대 동기들이 판검사가 되어 안락한 생활을 할 때 그는 사회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렸다.
대학 졸업 무렵 눈 덮인 가야산의 한 암자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 방에 시위를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 중인 운동권 출신의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유신헌법을 외우고 있을 때 그는 프랑스혁명사를 읽고 있었다. 겨울 햇볕이 암자의 툇마루로 쏟아지는 낮이 되면 우리는 거기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약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 같았다. 나도 마음은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이 십자가를 질 용기가 없었다.
민주화가 됐다. 투쟁가인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다. 개혁이 실시됐다. 김영삼은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재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시대를 만들겠다고 했다. 주님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말이 돌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다. 많은 부동산 부자들이 “이게 나라냐?”라며 죽는 소리를 하는 세상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금모으기운동은 온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는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의 IT강국이 되는 초석을 깔았다.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두 바퀴로 굴린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시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암에 걸린 채 혼자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직접 이런 말을 들었다.
“정부에서 이런 아파트도 주고 매월 생활비도 보조해 줍니다. 목욕을 시켜주는 사람이 와서 몸을 씻겨 줍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복지정책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탄핵까지 당하고 능멸을 당한 대통령이지만 그가 좋은 세상을 만든 걸 피부로 실감했다.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 변호사를 개인적으로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으냐고 물었다. 갈망하는 것을 진심으로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검찰개혁과 경제민주화’라고 했다. 그의 정권에서 공수처법이 통과됐다. 제대로 운영된다면 검찰권력이 국정을 농단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와 의회를 돈으로 오염시켰던 재벌그룹 회장이 구속됐었다. 국민이 뽑은 의회 구성원이 더 이상 재벌의 지배를 받기 힘들게 했다.
정치의 표면에는 거대한 파도가 꿈틀거리고 물보라가 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민주화의 바다를 운행하고 있다. 그런 배경에는 장기표 선생 같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상가들이 있다. 장기표 선생은 민주화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거절하면서 “나는 지식인의 도리를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를 팔아서 현재를 살지 않았다. 그는 정치판에서 운동권 출신들이 한정된 권력, 일정한 자리와 재물을 두고 싸우면서 변질되는 걸 봤다.
굶주린 쥐를 독 속에 넣으면 서로 증오하고 잡아먹는다. 그들의 모습도 비슷했다. 신은 장기표 선생이 그 독 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은 것 같다. 그는 재야에서 꾸준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 최근엔 국회의원 특권을 폐지하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말 대로 그는 할만큼 했다. 그가 뿌린 씨의 열매는 하늘에 계신 그 분이 맺게 해 주실 것이다.
한 시민으로서 장기표 선생에게 감사하며 이제 그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