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장기표와 <전태일 평전>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1심 재판정에서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왼쪽부터)

이 글은 전상훈 ‘전상훈 TV’ 앵커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장기표 선생을 떠나보내며’란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 <편집자> 

청계천 봉제노동자 전태일은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읽지 못할 때마다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이라고 탄식했다. 전태일은 국민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이 소식을 접한 학생운동의 지도부였던 장기표는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는 “서울법대 장기푭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이 그렇잖아도 ‘나한테는 왜 대학생 친구도 하나 없나’ 그랬는데, 죽고 나서야 이제야 나타났구나.”

장기표는 법대 학생운동 동지로서 당시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한달음에 달려온 조영래와 함께 전태일의 장례를 치르는데 힘을 보탰다.

장기표는 유족으로부터 전태일 열사의 일기장과 각종 자료를 받았고, 열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자료를 1970년 12월 사법고시에 합격한 조영래에게 전하며 정리를 부탁했다.

조영래는 사법연수원과 감옥생활(1년 6개월), 수배생활(5년) 등 무려 8년에 걸쳐 전태일평전 집필을 완료했다. 평전은 1978년 일본어판으로 첫 출간됐다. 박정희 유신독재 치하에서는 출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 일어판

1978년 일본어판의 책 제목은 ‘炎よ、わたしをつつめ-ある韓国青年労働者の生と死’였다. 한글로 번역하면,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다.

이 책의 저자 이름은 ‘金英琪(김영기)’다. 이 이름은 가명이다. 책 출간에 기여한 세 사람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김정남의 김(金), 조영래의 영(英), 장기표의 기(琪)를 합친 것이다.

장기표는 평전 총괄 기획, 자료수집 및 유가족 구술 최초 정리, 조영래는 유가족 구술 추가 정리 및 대표집필,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민주화운동가 김정남은 일본어판 출판 진행을 각각 맡았다. (김정남은 훗날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일했다. 1987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의 진실을 감옥 안 이부영으로부터 전달받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5.18미사를 통해 세상에 알린 분이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

전태일 평전은 1983년에서야 한국에서 출판됐다. 저자의 이름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이었다. 1980년대 대학생 가운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0년 조영래 변호사가 43세에 타계했다. 그때까지 세 사람 모두 일본어판 전태일평전의 저자 ‘김영기’에 대해 함구했다. 1991년에 이르러서야 장기표가 조영래가 평전의 저자임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김정남이 이를 확인해줬다. 그후 전태일평전의 저자는 조영래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장기표 선생이 9월 22일 타계했다. 나로서는 그와 1990년 민중당 창당 동지로 인연을 맺었고, 1992년 백기완 민중대통령후보의 수행비서로 일할 때 백기완 선생과 장기표 선생이 만날 때 인사드렸다는 실낱같은 연결만 있을 뿐 개인적 인연은 전혀 없다. 다만 민주화운동 20년 후배로서 전상훈은 장기표 선생의 진실함과 치열함을 늘 귀감으로 삼았음을 고백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장기표 선생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이후 많은 연구가 이어지리라 믿는다.

장기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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