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씨 “일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일에서 힘을 얻었다”
지난 주말 조선일보에서 ‘설악산의 마지막 지게꾼’이라는 기사를 봤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산속 암자에 생필품을 나르면서 오십년을 일해 왔다는 것이다.
나의 뇌리에 지게꾼은 어떤 직업일까. 지게꾼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인 막노동자 같은 밑바닥의 직업이었다. 우리 어린 시절 부모들은 지게꾼을 가리키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하기도 했다.
나의 뇌리에는 지게꾼에 관한 몇 장면이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남아있다. 서울역 부근에 수 많은 지게꾼들이 있다가 기차가 도착하고 승객들이 나오면 달려가 서로 짐을 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먹고 살기 힘들 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이 지게꾼이었다. 굵은 나뭇가지로 엉성한 지게를 만드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햇볕에 새까맣게 탄 바짝 마른 남자가 지게에 낡은 장롱과 이사 보따리를 산같이 지고 가파른 산동네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지게 작대기로 버티면서 한발 한발 디디고 올라갈 때마다 다리가 떨린다. 이윽고 양철문을 한 판자집에 도착해 짐을 내리고 지게꾼은 품값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통제하고 드론이 물건을 운반하는 2024년 7월까지 그런 지게꾼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지게꾼은 평생 한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짐을 지고 산을 타면서 평생을 단순하게 살았어요.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행복한 직업이었어요. 하나님이 건강한 체력을 재능으로 주셨다고 생각하고 지게꾼을 내 직업으로 받아들였어요. 일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일에서 힘을 얻었죠.”
툭 툭 쉽게 던지는 그의 말에서 나는 보통을 뛰어넘는 그의 정신적 경지를 느꼈다. 하나님은 어쩌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가장 나쁜 배역을 그에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는 ‘받아들임’이라는 철학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건강을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인식했다.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내면의 눈을 가진 것 같다. 무거운 짐이 실려있는 지게를 지고 오십년 산을 오르는 그의 행위는 도를 닦는 그의 수행이 아니었을까.
지게라는 물건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철학을 배운 일이 있다. 나와 친한 가구회사 사장이 있다. 강남이 개발되던 시대 그의 가구점 브랜드는 주부들의 자랑이었다. 며칠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릴 때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었지.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지게에 나무를 잔뜩 얹어 놨었지. 무거워도 지게 작대기를 이용해서 중심을 잘 잡고 일어서면 일어나 져. 지게를 한번 등에 지면 무거워도 그런대로 걸어갈 수 있어. 문제는 마지막으로 지게를 내려놓을 때야. 짐이 너무 많으면 그때 꼭 중심을 잃고 지게하고 같이 나자빠졌거든. 매번 그랬어. 그래서 나는 욕심을 버리고 지게에 내가 질만큼만 지고 가야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놓을 수 있는 걸 알았지. 인생도 마찬가지야. 나는 돈을 벌었다고 욕심을 내서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어. 사업도 적당한 시기에 정리했는데 욕심이 지나치면 어린 시절 지게를 내려놓을 때처럼 쓰러진다는 걸 알았지. 그게 내가 배운 ‘지게철학’이야.”
그는 북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담한 별장에서 평화로운 만년을 보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변호사인 나도 남의 고민과 고통을 짊어지고 옮겨주는 지게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애환과 아우성을 잔뜩 마음 지게에 담아 어두운 터널을 함께 걸어가기도 했었다. 어떤 때는 같이 거꾸러져 상처를 입기도 하고 거대한 절벽 앞에서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사십년 가까운 세월을 걸어왔다.
설악산의 마지막 지게꾼은 몸은 피곤했어도 마음은 행복했다고 했다. 나는 나의 직업에서 그런 행복을 느꼈던가. 자신이 없다. 그는 일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일에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나는 그 깊은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는 누구나 결국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천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