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렘브란트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미술품 수집가인 선배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 변호사가 소개해 20년 전 내 인물화를 그린 그 화가 연락처를 알 수 없을까?”
“왜요?”
“그게 작품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야”
“혼자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화가였어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죠.”
“아쉽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 화가가 시간의 저편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20년전 아내가 갤러리를 할 때 인물과 계곡만 그린다는 화가가 있었다. 그가 그린 시골 노파와 리어커를 끄는 노인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갈라진 논같이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하고 파뿌리같이 하얀 머리를 한 노파였다. 또 다른 그림은 고물이 가득 찬 리어커를 힘겹게 끌고 가는 영감의 모습이었다. 그림 속의 노인들이 내게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화가가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화가의 계곡그림을 빌려 나의 사무실 벽에 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절벽의 바위가 투병한 물에 무겁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화가의 혼이 들어 있었지만 죽음을 암시하는 암울함이 느껴져 나는 그 그림을 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생활을 돕기 위해 주위의 변호사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영정사진 대신 쓸 인물화를 그가 그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제법 큰 나의 인물화를 그려와 내게 사라고 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불쾌했다. 불만이 가득하고 비뚤어진 나의 내면이 드러난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감춘 치부를 들킨 것 같다고 할까. 나는 사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그냥 두고 갔다. 그 그림은 쓰레기장 옆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가 도로 찾아가지 않으면 찢어서 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그림은 없어졌다.
그는 괴팍한 면을 가진 것 같았다. 내가 인물화 제작을 소개해 주면 자기가 그릴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만나서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만나게 해주면 식사 자리에서 예의를 벗어난 행위를 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그를 도왔는데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그와의 관계를 끝냈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서 더 도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20년 만에 그의 작품을 인정하는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천재적인 예술가를 몰라봤을 수도 있다. 나는 그를 만났을 무렵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일기장 속에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열두 살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지금은 가족도 없고 먹고 잘 곳도 없어요.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서 목재소에 가서 톱밥을 압축한 판을 사다가 잘라서 그 위에 그림을 그려요. 조각도로 표면을 파내고 그리죠. 초등학생들이 쓰는 싸구려 조각도를 쓰니까 잘 나가지를 않더라구요. 큰 마음 먹고 인물화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좋은 조각도를 사서 써보니까 손길이 부드럽게 잘 나가더라구요.”
그가 어떤 형편이었는지를 알 것 같다. 그는 작품을 할 시간이 아까워 미술 지도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도 했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장점만 그리면 너무 예쁜 얼굴만 나와요. 그건 참 모습이 아니죠. 단점을 그리면 주문한 사람들이 싫어해요. 자기가 아니라면서 화를 내기도 하죠. 렘브란트도 인물화를 많이 그렸어요. 장점만 그려서 팔 때는 주문이 밀렸대요. 그러다 그게 예술이 아니라는 걸 알고 단점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점점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이 줄어들었어요. 마지막에는 먹을 게 없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식을 먹은 게 렘브란트예요. 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면 배고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죠. 저는 계곡물 위에 비친 바위의 얼굴도 15년간 그려왔어요. 그 바위는 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수천 년 수만 년 거기 앉아 있었죠. 저는 바위의 얼굴에서 참회를 봤어요.”
그는 대상의 내면에 들어있는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 같았다. 물에 비친 바위의 얼굴에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을까. 그가 바위의 얼굴에서 참회를 봤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성화를 그릴 겁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거예요.”
내 방의 벽에는 그가 캔버스 대신 톱밥을 압축한 판을 작게 잘라 그 위에 그린 나의 얼굴을 담은 인물화가 걸려있다. 2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모습의 뒤에 얼핏 그 화가의 숨은 모습이 비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