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현충원 안의 부끄러운 귀신들
소설가 정을병씨가 살아 있을 때 친했었다. 그는 소설은 몸으로 써야 한다는 문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는 국토건설단에 직접 들어가 체험을 하고 <개새끼들>이라는 소설을 써서 강제노동을 폭로했다. 그 댓가로 문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그가 노인이 된 어느 날 국가에서 증명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민주화운동에 공헌한 인물이라는 내용이었다. 간첩에서 민주화 투사로 변한 것이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김동인의 친일 사건을 맡고 있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김동인의 작품을 배웠다. 그는 해방 직후 김구 주석의 일대기를 쓰는 민족주의 작가로 존경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해방 60년이 지난 후 갑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뒤늦게 생긴 위원회에서 결정이 됐다. 일제시대 쓴 그의 작품 중에 친일 성향의 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들은 정을병씨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란 양면성이 있어요. 절대 영웅도 없죠. 인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치부가 있는 거죠. 다만 세상이 필요에 따라 영웅으로 만들 뿐이예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 의사도 접근해 보면 큰 흠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겁니다. 다만 역사에서 힘을 잡은 측이 모든 걸 흑백 이분법의 논리로 단죄하죠.”
내 말을 듣던 그가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죠. 며칠 전 신문을 보다가 한 구석에서 항일 운동가 아무개 선생이 죽었다는 기사를 봤어요. 죽은 그 양반의 사진을 보면서 픽 웃었죠. 왜 그랬는지 알아요? 내가 소설가협회 회장으로 이름 석자 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을 때였어요. 하루는 그 사람이 찾아와서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든 데 한가지 방법이 있다는 거예요. 항일운동을 했다고 보훈처에서 인정해 주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거죠. 그 친구는 일제시대인 중학교 2학년때 동네 뒷동산에 가서 나무껍질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것 때문에 경찰에 끌려갔다가 석방됐다는 거예요. 유명한 글쟁이인 내가 신청서에 그 사유를 잘 써주면 될 것 같다는 거죠. 그래서 그 사연을 구구절절 써 줬어요. 단편소설 하나 써준 셈이죠. 안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가 항일애국지사로 판정이 난 거예요.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그 친구 죽을 때까지 정부에서 연금을 받았죠. 그리고 죽고 나니까 항일 애국지사가 되어 신문에 나오데.”
“그런 엉터리 항일독립 운동가도 많겠네요?”
“많다마다요. 실제로는 매국을 하고도 애국자가 된 경우도 있고, 또 애국자이면서 친일파로 된 경우도 많을 걸요. 친일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감정적이고 한번 우기면 시정하려고 하지를 않죠. 이완용 하면 무조건 매국노인데 그의 항변을 들으려 한 적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나요? 우리에 비해 일본 사람들이 훨씬 정확한 면이 많아요. 우리는 조작이다 뭐다 해서 부인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 기록들이 훨씬 더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진실하게 묘사하고 있을 거예요. 일본 자료들도 찾아서 그들의 시각에서 본 팩트는 어땠는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거예요.”
정을병은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었다. 또 강직한 작가이기도 했다. 고향이 남해인 그는 임진왜란 때 7년이나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남해는 일본 사람의 피가 섞인 경우가 많다고 한 글에서 썼다. 눈썹이 검고 털이 많은 특징이 그것이라고 했다. 그 글이 전해지자 고향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를 이단자로 낙인찍었다. 그가 죽은 후 내가 다른 문인들과 함께 그의 문학비를 고향에 세워주는 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은 그를 거부했다. 진실이 불편했을까.
얼마전 우연히 KBS 탐사보도팀에서 취재한 ‘밀정’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다. 취재팀이 백년 전 일본의 외교부나 군부의 문서를 열람했다. 그 안에는 조선인 밀정과 밥을 먹고 돈을 건네준 조선 주재 우쯔노미야 일본군 사령관의 꼼꼼한 일기까지 있었다. 안중근 의사와 거사를 함께 했던 동지부터 김구의 비서까지 8백명이 넘는 친일파 조선인 밀정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밀정의 상당수가 해방후 건국훈장을 받았고 지금은 국립현충원에 애국지사가 되어 묻혀있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사의 이율배반이라고 할까.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실이 허위가 되는 세상을 경험했다. 본질을 보는 마음의 눈이 열려 그런 것들이 바로 잡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