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슬픈 이면’…”아버지가 찢겨 죽었어요”
나는 역사책에서 만주에 살던 한국인들이 학살된 사실들을 보지 못했다. 독립군의 승전 기록인 청산리전투만 봤다. 용정에 살던 노인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찢겨 죽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일제시대를 살아온 한국의 종교지도자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일제시대 우리 독립군이 일본인 한 명을 죽이면 일본 군대는 만주의 우리 민족 백 명을 죽였습니다. 저는 패배가 뚜렷한 무장독립운동을 그렇게만 해야 했던 것일가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온 민족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강단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장에서 자기의 힘을 기르고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고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희미한 기억이라 취지는 분명하지만 몇 단어는 나의 언어로 바꾸었다. 그 후 나는 국립도서관 논문관에서 청산리 전투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용정 출신 노인의 아버지가 찢겨죽었다는 근거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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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조선에서 만주로 망명해 오는 청년들의 수가 급증했다. 러시아령 자유시에서의 무기구입도 용이했다.
독립군의 부대편성이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갑산과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를 습격했다. 홍범도 부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만포진을 점령하고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고 그곳 헌병대와 경찰서를 불살라 버렸다. 독립군은 이어서 천수평의 일본군을 몰살시켰다. 일본군 사단병력이 출동하고 대혈전이 벌어졌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3300명에 이르렀다. 민족의 쾌거인 무장독립군의 승리였다. 청산리의 패전 소식을 듣고 평양의 일본군이 출동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출동사실을 미리 알고 시베리아의 치타를 거쳐 자유시 쪽으로 가버렸다.
“일본군 1개 대대가 마을을 포위한 채 산적한 밀짚더미에 불을 지르고 눈에 띄는 남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사살했다. 채 죽지 않은 자는 불 속에 밀어 넣어 태워 죽였다. 온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들은 일대의 모든 촌락에 불을 질렀다. 잿더미 속에 타죽은 시체가 수없이 보였고 시체엔 총탄 자국이 벌집처럼 뚫려 있었다. 타는 시체의 악취가 코를 찔렀고 어린애를 업은 아낙의 통곡 소리가 흡사 생지옥처럼 처절했다. 내가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데 한 노파와 며느리가 잿더미 속에서 불탄 고깃덩이와 부서진 뼈와 아직 타지 않은 가재도구를 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사진기를 들이댔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 번이나 고쳐 찍었다.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 기도드렸다. 그런 학살행위는 용정, 화룡, 왕청 등 한국인이 모여 살고 있는 곳에서는 예외 없이 벌어졌다.’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의 적극적인 활동 기록은 찾기 힘들었다. 당시 일본군은 만주와 중국을 점령하고 세계대전을 벌일 정도로 강한 군대였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에서는 그걸 계기로 혁명이 일어났다.
무장독립운동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일까. 만주에서 떼죽음을 한 죽은 영혼들은 역사책 한 페이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통곡 소리와 화약 냄새, 피 냄새가 도서관의 서가에 숨어있는 일부 논문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의 한국인에게 그건 듣기 싫은 먼 나라의 스토리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