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
방송의 토론 장면이 나오고 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 아래서 평론가 김갑수씨가 교회의 타락과 정치 목사의 부패를 질타하고 있다. 그 앞의 성직자들이 시원한 항변이나 변명을 못하고 있다. 그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정도의 궁색한 답변을 하는 것 같았다.
그 프로를 보면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됐을까?’를 생각해 봤다. 나 역시 기독교인들을 비웃고 조롱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논리나 이성이나 역사적 증명으로 오지 않았다. 신학도 아니었다. 나의 개인적 체험과 깨달음이라고 할까.
젊은 날 거듭되는 실패와 고난이 있었다. 벼랑길에서 추락해 일생 정신적 불구자로 살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고 하나님’하고 부르짖고 간절히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 하나님이 성경 속의 하나님인지는 잘 모르겠다.
30대 중반쯤의 어느 봄날이었다. 갑자기 성경을 읽고 싶었다. 기름에 불씨가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그 마음이 활활 불타올랐다. 어떤 존재가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등을 확 밀어버렸다. 관념이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서점으로 달려가 성경을 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탐식하는 짐승처럼 읽었다.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읽혀졌다고 할까. 낮에도 밤에도 여행을 가도 길거리를 가면서도 읽었다. 뭔가에 들씌운 것 같았다. 백삼십 번 가량을 그렇게 읽었다.
성경 속은 지옥이었다. 온갖 부정과 부패 음란에서 악취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시기와 질투 온갖 악행이 벌어지는 교회들이 들어차 있었다. 성경 속에 수많은 인간들이 등장하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를 동생이라고 하며 다른 남자에게 바치는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었다. 무능하게 도망만 다니는 게 그의 아들이었고 또 그의 아들은 사기꾼의 전형인 것 같았다. 등장하는 교회는 온통 파당을 짓고 싸움질이었다.
성경의 첫머리에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족보 자랑인 줄 알았는데 개족보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으로 태어나고 창녀가 애를 낳고 부하를 죽이고 그 아내를 겁탈해서 나은 자식도 있었다. 예수 역시 세상에서는 무기력했고 사형까지 당한 실패자였다. 사도라는 인간들도 무식한 보통의 인간이었다. 욕심을 가지고 예수에게 접근했던 인물도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다들 도망하거나 배신하기도 했다.
지금의 교회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성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 한마디로 정신이 번쩍 들고 도를 통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 있을 걸로 생각했었다. 어느 순간 그런 사실들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이 바뀌었다. 아니 어떤 존재가 나의 시각을 바꾸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얘기들이 남의 얘기가 아니고 나의 얘기인 것 같았다. 성경을 통해서 나의 숨겨진 것들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정직하게 묘사하고 처방을 알려준 경전이 없을 것 같았다. 경전의 정직성에 놀랐다.
하나님은 시궁창 속에서 빠져나오라고 조용한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빠져나올까 나는 방법을 몰랐다.
나이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 성경 속에서 엉뚱한 걸 발견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에게 내렸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속에 있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는 자기가 죽은 후에 영이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길을 가다가 죽은 예수의 영을 만났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일생을 예수의 영에 이끌려 살다가 갔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예수의 제자들도 오순절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은 후 그 영혼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성령이 그들을 사도로 만든 것 같다. 그 후에도 2천년이 넘는 기간 성령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고요히 내려앉고 있다. 나는 영혼 속에 성령을 받아들인 사람이 크리스챤이라고 믿고 싶다.
성령은 관념으로 굳어진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 숨 쉬는 진짜 하나님이라는 생각이다. 신학박사 학위를 따도, 목사 자격증을 얻었어도, 교회의 열성 신도라도 내면에서 성령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가 기독교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