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내면 깊은 곳 나의 영 속에 있는 ‘그 분’
서울 집에 일이 있어 잠시 왔더니 우편함에 편지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이상했다. 편지의 표면에 동까지만 주소가 적혀 있었고 한자로 쓴 내 이름도 글자가 틀렸다. 그런데도 편지가 제대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발신지를 보니까 감옥 안에서 쓴 것 같았다. 뜯어서 내용을 보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을 사형수라고 했다. 자신의 억울함이나 삶에 대한 것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변호했던 ‘대도’의 배신이나 교활함에 실망하지 말고 계속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정의 좋아하네”라고 나를 비웃고 조롱했어도 참으라고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쓴 칼럼들을 보고 자기 생각을 써보낸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사형수가 세상을 향해서 말을 걸고 싶은 것일까. 여러가지 경험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변호사를 하면서 밑바닥에 있는 여러 형태의 인간을 보아 왔다. 변호사를 처음 시작할 때 낭만적인 기도를 했다. 인간을 사랑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라고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고 싶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보통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한번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세상을 사는데 피해가 돌아오고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련했다. 모난 돌이었다. 나를 깨고 부스러뜨릴 망치와 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번 모함과 고소를 당했다. 형사나 검사에게 모욕과 능멸을 당했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조롱당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튀거나 모가 나면 사람들은 정을 대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 같았다.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진리는 간단하다. 살라고 하니까 문제지 죽으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때려죽일 용기보다 맞아 죽을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나는 몸으로 그걸 배웠다. 나는 세상에 자주 속았다. 물에서 건져주니까 보따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을 꿔 가곤 갚지 않았다. 가짜수표를 가지고 와서 사기를 치기도 했다. 변론을 했던 부동산 사기범이 석방 후 내게 찾아와 엉터리 땅을 사라고 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한 예화가 떠올랐다. 개구리가 물을 건너려는 강가의 전갈을 등에 업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넌 후 전갈은 독침을 개구리의 몸에 찔러넣었다. 그게 악이라고 하기보다는 전갈의 본능이었다. 개구리가 전갈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했을까.
슬픈 사실이지만 성경에도 악인이 선인이 될 수 없는 걸 고백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휩쓸어버릴 때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살덩어리’라고 표현했다. 나는 뒤늦게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껍데기는 인간이라도 전갈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죽어 있는 영혼을 가진 존재는 걸어다녀도 살덩어리라는 것을. 그 분의 영이 나의 영으로 들어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나 자신이 전갈이고 살덩어리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내면 깊은 곳 나의 영 속에 있는 그 분과 만나기 위해 매일 기도한다. 내 속의 그와 대화하는 게 기도가 아닐까. 누구를 돕는 것도 그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나의 인간적인 의지로 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위선이나 가식, 허영 등의 불순물이 잔뜩 낄 수 있다. 그 분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일이 되지도 않는다. 외형적으로 된다고 해도 그건 가짜였다. 갑자기 도와달라는 어떤 부탁과 마주칠 때가 있다.
상황이나 논리가 도와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상하게 그런 때도 내면 깊은 곳에서 찬성하지 않는 어떤 직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는 내 의지로 이성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는다. 내면의 깊은 속에 있는 그 존재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 정확했던 걸 체험했다. 요즈음에 와서는 믿음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형수의 편지를 받고 그 분께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