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인간을 만드는 거푸집…”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본을 보이는 것”
추석연휴를 맞아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인 열두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동해 바닷가 나의 집으로 왔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녀는 공부 때문에 바빠서 못 온다고 했다. 내가 첫 정을 흠뻑 들인 손녀였다. 동해 바다를 보면서 딸은 이제야 푸근한 친정을 가진 느낌이라고 했다. 그동안 지방 도시에 친정집이 있는 여자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어제는 가족을 데리고 근처 작은 온천으로 갔다. 손자를 데리고 탕에 들어가 같이 목욕을 했다. 매점에서 핫도그와 음료수를 사 먹었다. 삼척 해변의 레스토랑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가족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노년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라는 얘기를 들었다. 밤에는 손자와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는 손자를 꼭 껴안아 주었다. 행복하다.
손자가 잠이 들고 나서 딸이 있는 방으로 가보았다. 딸은 패드에서 영어로 된 외국의 미학 논문을 읽고 있었다. 딸은 금년에 서울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정주부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했다.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쉬지 않고 야금야금 자료를 읽고 논문을 쓰는 것 같았다. 작거나 크거나 성공 뒤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딸의 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사돈 내외와 사위에게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들의 양해와 지원이 없었으면 딸은 학위를 딸 수 없었을 것이다. 딸의 공부를 받아들일 시어머니와 남편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사돈 부인은 며느리를 도와준다고 첫 손녀를 맡아서 키우다 싶이했다. 교육에는 베테랑인 할머니다. 회사원 아내로 내조하면서 아들 둘을 다 서울대에 합격시킨 엄마였다. 형은 의사가 됐고 동생은 변호사가 됐다. 며느리를 박사로 만들고 손자 손녀들에 대한 꿈도 벌써 만만치 않다. 손녀에게 신경줄을 놓지 않는 할머니라고 했다. 손녀가 혹시나 다른 데 호기심을 보이는 눈치면 손녀가 있는 곳까지 따라가서 달래가지고 오는 열정적인 할머니다. 손녀는 그런 할머니 덕분에 궤도 위에 올라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외할아버지인 내가 서울에 가서 음식점에서 손녀를 잠시 만날 때였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손녀는 단어를 외우고 패드에서 수학 문제를 떠올려 풀고 있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아이들을 만드는 것은 학원이 아니라 어른들이 보여주는 집안의 어떤 흐름 내지 분위기는 아닐까.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1년 선배가 있다. 가치관이 뚜렷하고 깊은 인격의 소유자다. 그는 오랜 세월 법관 생활을 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어. 아버님이 철학 교수였는데 논문을 쓰시면 나보고 교정 교열을 보라고 하시는 거야. 처음에는 글자만 고쳤는데 아버지 논문을 자꾸만 읽다 보니까 철학이 내게 들어간 거야. 나중에는 내용까지 고쳤지.”
그의 철학은 아버지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작가인 김훈씨가 이런 말을 한 것도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언론인이고 소설가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아프셨죠. 제가 아버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가 구술하는 문장들을 원고지에 한자 한자 또박또박 받아 적었죠. 아버지는 마지막에 마침표나 쉼표를 어디에 찍어야 할지도 지적했어요. 그때 문장에 대해 철저히 배운 것 같아요.”
그의 문학 역시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내 딸이 세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내게 쪼르르 달려오더니 무릎 위에 앉으면서 “아빠는 맨날 맨날 공부만 해. 놀아주지도 않고”라며 원망을 했다. 참 미안했다. 그런 딸이 자기도 자식들 앞에서 맨날 공부만 하더니 박사가 됐다.
나는 내 이불 속을 파고드는 열두살 짜리 손자에게 자연스럽게 내 일상을 보여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니까 옆에서 따라 한다. 이틀이 지나니까 녀석의 행동이 달라졌다. 내가 머리를 식힐 때 치는 전자드럼 앞에 앉아 스틱을 손에 들고 박자를 맞추고 있다. 내 옆에서 연필을 들고 성경 속의 ‘시편 23장’을 쓰고 있다. 그리고 자기 방에서 싸들고 온 <삼국지>를 읽고 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앞에서 본을 보이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