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중세시대에 ‘면벌부’가 그냥 팔렸을까요?
로마서 2장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의 상태를 누가, 무슨 수로, 무슨 자격으로 측정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내면적 변화는 표면적 변화보다 측량이 어렵고 까다롭습니다. 내면은 말 그대로 안쪽 면이라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호한 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을 가꾸는 것이 훨씬 수월합니다. 내면의 동기를 가다듬기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신경을 쓰는 편이 명쾌하고 명확합니다. 애매모호한 것보다 확실한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까? 규범이나 법은 양심이나 도덕보다 명확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훨씬 적습니다. 기준만 치밀하게 정해놓으면, 그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을 간편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명쾌하다는 것이 율법주의의 힘입니다. 율법에는 언행의 사소한 부분까지 적용할 수 있는 지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보다는 ‘안식일에는 2미터 이상 물건을 옮기지 말 것’이라는 규정이 더 명쾌합니다.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알기 힘든 마음의 할례보다는 육신의 할례가 아무래도 확실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믿기 쉬운 하나님을 만든 것입니다. 보이지 않아 모호한 하나님은 믿기가 어려웠기에 하나님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형상화한 것이 금송아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편하게 믿어보려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형상을 만드는 일과 율법의 법조문으로 신앙을 규정하려는 행위는 동일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이라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보증서 발급에 집착하는 종교심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믿음, 소명과 같은 것의 보증서를 손에 쥐어야만 안심이 되는 심리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면벌부가 그냥 팔렸을까요? 면벌부를 팔아 돈을 벌고 싶은 교황청의 욕구와, 구원을 보증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구매 욕구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주의적 측정과 법조문에 의한 규정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모호함을 내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신비를 이성의 칼날로 도려내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