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이종찬과 안병직 두 원로의 역할은 과연 뭘까?
2007년경 나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김동인과 조선인 사업가 김연수에 대한 친일 소송의 변론을 맡았었다. 그들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나 여부를 판단하는 법정이었다.
나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 시대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사회원로로 존경받는 두 분이 일제시대와 건국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 분은 독립운동가 집안인 이종찬 의원이고 다른 한 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서울대 안병직 교수였다.
이종찬 의원을 만나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안병직 교수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담긴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같은 시공간을 살았어도 입장에 따라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이종찬 의원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다. 그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대대로 정승판서를 한 사대부 집안이다. 이회영이라는 인물은 조선 사대부의 정신을 대변하는 존재였다고 할까. 사대부는 단순한 왕의 신하만은 아니었다. 정도전이 확립한 조선은 왕과 사대부가 공유하는 나라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이회영은 모든 재산을 팔고 일가친척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상해 임시정부에도 관여했다. 그들에게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은 건국이었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강도에게 빼앗긴 불법적인 무효의 행위였다.
그 집안의 희생은 대단했다. 빈민이 되고 감옥에서 죽기도 했다. 해방 후 상해 임시정부가 귀국했다. 정통성이 인정되는 정부고 국토도 반환받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승만이 지도하는 지주들의 한민당이 결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한민당에 대한 시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한민당은 그들을 어떻게 봤을까.
1945년 12월 중순경 관수동의 국일관에서 한민당 간부들과 임정 요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임정측의 신익희가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 하지 않고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어?”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시각인 것 같았다. 일본회사에 취직을 해 가족과 웃으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땠을까. 모두 영혼을 판 좀비이거나 친일파로 보였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숙청이 되겠군”
그 자리에 있던 한민당측의 장덕수가 신익희의 말을 되받았다.
“그게 어디 장덕수뿐일까?”
묵묵히 듣고 있던 한민당 원로 송진우가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했는데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요? 국민들이 떠받드는 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당신들이 잘나서가 아니오. 국외에서 당신들은 배가 고팠겠지만 국내의 우리들은 마음이 아팠소. 당신들만 애국자라는 망상은 하지 마시오.”
그 후 장덕수와 송진우는 암살됐다. 김구도 암살됐다.
한민당과 임정의 그런 생각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인 광복회장 이종찬은 1948년을 건국한 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일제의 식민 지배가 불법무효라는 것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친일파 뉴라이트들이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우려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의 사상적 배경으로 알려진 안병직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당시 세계 각국이 인정한 현실이다. 조선 왕실도 일본의 작위를 받아서 호의호식했다. 어려울 때 독립운동 하신 분들의 노고를 안다. 1948년 건국의 정신적 지주는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을 부정하면 건국을 정당화 할 수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건국은 아니다.”
이종찬옹은 독립운동가 집안의 시각에서 그 시대와 나라를 보고 있다. 안병직 교수는 학자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프리즘이 다르고 역사해석도 갈리고 있다. 민주국가는 그런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친일의 문제가 논쟁의 장을 벗어나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