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먼저 죽은 사람들은 나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내가 아는 천재 시인이 있었다. 그는 젊은 날은 영혼을 갈고 닦는 수행의 시기로 생각하고, 숙성된 좋은 시는 육십 고개를 넘으면 쓰기로 작정했다. 그가 나이 육십에 이르렀을 때 폐암 통보를 받았다. 그가 죽기 며칠 전 만났다. 그는 내게 뭐든지 쓰고 싶은 것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그때그때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죽은 후 나는 영정사진 안에서 나를 선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마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박노해 시인의 ‘길’에서.

어느날 아침 기도를 하는 데 난데없이 두 죽음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첫 장면은 글을 쓰다가 책상에 머리를 대고 조용히 죽은 장면이었다. 그가 쓴 원고들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삶의 에너지를 마지막까지 다 쓰고 죽은 것 같았다.

두 번째 장면은 일을 하다 잠시 쉬는 사이 그 영혼이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낡은 옷같은 몸만 굳은 채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여러 형태의 죽음의 모습을 보았다. 어둠의 바닥에서 추하게 살던 사람의 허망한 죽음들이 의외로 많았다.

2년 전 오랜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사람의 시신을 처리했다. 그에게는 교도소보다 세상이 더 버거웠던 것 같다. 석방된 지 여섯달만에 그는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라고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화장장의 불꽃 속에서 사라지는 그를 보면서 허망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시궁창 같은 범죄 세계에서 살다가 그렇게 갔다. 그는 죽어서도 혼자였다. 그의 유서같이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비슷한 또 다른 인생을 알고 있다. 어려서는 거지생활을 했다. 성장해서는 도둑이 됐다. 나이를 먹어서도 그는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살았다. 노숙자 합숙소의 구석방에서 그는 혼자 죽었다. 시설 담당자는 그가 죽기 전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고 했다. 그 눈물 속에 어떤 회한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는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이런 곳에서 이렇게 추하게 죽다니’ 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는 범죄의 천재라고 자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종 그가 구상한 범죄를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진짜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그 역시 자기 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 그의 방은 텅 비고 메말랐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미션은 없었던 것일까. 그들의 존재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척박한 환경쪽의 죽음만 본 게 아니다. 나는 그 반대편의 죽음도 목격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지능까지 갖추고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명문 학교를 나오고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승부욕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그가 소송에 걸렸다.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는 진다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소송에서 그가 질 것 같자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죽기 몇 시간 전 중환자실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진심은 살고 싶은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긍정했다. 그리고 죽었다. 죽음을 가지고 놀다가 그는 죽은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던 고교 선배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모범생으로 컸다. 일찍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비상한 머리와 후덕한 성품을 가진 그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검사 생활을 마치고 정계로 진입할 무렵 그는 엉뚱한 소환장을 받았다. 담도암 말기라는 통보였다.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몸무게가 빠지고 있었다. 머리털도 빠졌다. 그가 내게 절규하듯이 하소연 했다. 그냥 가족  하고 맛있는 고기를 궈먹으며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인 줄 모르고 출세욕에 빠져 헛짓만 하다가 간다고 했다. 그의 시신이 소각로에 들어갈 때 나는 그 앞에 서서 그가 말한 행복론을 되새기고 있었다.

좋은 생각을 해도 하늘은 인간의 계획대로 들어주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천재 시인이 있었다. 그는 젊은 날은 영혼을 갈고 닦는 수행의 시기로 생각하고, 숙성된 좋은 시는 육십 고개를 넘으면 쓰기로 작정했다. 그가 나이 육십에 이르렀을 때 폐암 통보를 받았다. 그가 죽기 며칠 전 만났다. 그는 내게 뭐든지 쓰고 싶은 것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그때그때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죽은 후 나는 영정사진 안에서 나를 선하게 바라보는 그에게 마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쁜 생각을 가지고 살거나, 욕심에 빠져 있으면 이 세상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순간의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닐까. 남의 죽음을 보고 나도 죽는다는 걸 알았다.

먼저 죽은 사람들은 나의 훌륭한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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