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반민특위 서순영 재판장…’시대의 닻’ 역할을 한 판사

일제강점기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발족 기념사진. 1948년 10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1차위원회 뒤 촬영했다

나는 해방 후 혼란기의 판결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해방 후 거리에는 “친일 지주 자본가 김연수를 처형하자”라는 벽보가 붙었다. 조선인 재벌 1호였던 그는 일제에서 중추원 참의 등의 직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친일파 척결의 거센 시대 조류에서 그는 엉뚱하게 무죄판결이 선고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벌이 받는 재판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 받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나는 시대가 모두 좌향좌 하는 속에서 혼자 우향우 하는 판결을 낸 서순영이라는 사람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나와 친한 원로 법조인 김이조 변호사에게 서순영 판사에 대해 물었다. 일제시대 교사였던 김이조 변호사는 해방 후 판사로 근무해 당시 법원 분위기와 판사들 내면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노년에 법조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그를 통해 서순영이란 인물은 서울의 적선동에서 법률사무소를 하던 인권변호사라는 걸 알았다. 해방정국은 그에게 반민특위의 재판장을 맡겼다. 재판장을 맡은 그는 노덕술 같은 거물의 친일파에게 준엄한 철퇴를 가했다.

그는 김병로 대법원장과 여러 번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는 법관이 여론이나 정치에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순영 판사

이미 오래 전에 숨진 서순영 판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그의 가족들을 수소문하다가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한 그의 아들 서주성씨와 힘들게 연락이 됐다.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확히 만난 시점이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2007~08년경 하얀 햇살이 쏟아지던 여름어느날이었을 것이다. 강남역에서 그를 만났다. 역 부근의 벤치에 자그마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가 서순영 판사의 아들 서주성씨였다.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게 빛바랜 문집 두 권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아버님이 평생 쓰신 시와 글들입니다. 아버님은 강직한 분이셨죠. 인재가 귀하던 그 시절 여론에 편승하면 출세가 보장됐죠. 그런데도 아버님은 시대상황과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소신대로 판결을 한 분이예요. 아버님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치파동을 일으켰을 때도 거기에 정면으로 반대 소리를 냈다가 법관직을 그만두셨습니다. 부산에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여신 후에는 독재를 반대하는 칼럼들을 쓰셨죠. 오십대 중반에 아버님은 변호사도 완전히 그만두시고 나머지 세월을 글을 쓰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반민특위 재판장을 할 때 정권이나 돈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판결을 했을 것이라는 무책임한 추측들에 대해 저는 분개합니다.”

서순영이라는 인물은 역사책의 갈피 속에 숨겨진 대단한 증인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아버님이 친일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느낀 감정을 얘기하신 적은 없습니까?”

담당판사의 마음의 프리즘을 통한 친일파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을 편린이라도 보고 싶었다.

“아버님은 3.1운동의 민족대표였던 최린씨의 재판장이기도 했죠. 아버님이 후에 밥을 먹으면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다른 사람들은 대개 구차한 변명에 급급하고 비굴한데 대조적으로 최린씨는 당당하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변절행위를 정면으로 시인하고 속죄한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재판장과 피고인으로 대했지만 최린씨의 식견과 인품 그리고 의연함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선 재벌 김연수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까?”
“그 재판이 있고 30년이 흐른 어느 날 제게 불쑥 그때 느꼈던 걸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재판 당시 대법원장인 김병로씨는 여론을 감안해 유죄를 선고하라는 쪽이었는데 아버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 말씀으로 일제시대 사람들은 관료의식이 강해 누구나 공부를 좀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한 자리를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김연수 사장한테서는 그걸 볼 수 없었다는 거죠. 일제시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는데 한번도 관직을 탐한 흔적을 못봤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민특위 재판이 있은 후 30년이 지나도 김연수란 사람이 공직이나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서서 자기를 과시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걸 보면서 아버님은 자기 판결에 대한 확신을 가지신 것 같았어요. 아버님은 김연수 사장이 일제시대 중앙고와 보성전문의 설립자금 대부분을 지원했는데 그건 민족정신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죠.”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일제 말기에는 모두들 일본쪽으로 다 기울어졌었는데 해방이 되니까 이번에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애국자가 방방곡곡에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한심해 하셨죠. 그런 엉터리 애국자들이 발호해서 친일선동을 한다는 거죠. 아버님은 악질적인 친일파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나는 역사책의 갈피에 숨어있는 서순영이라는 현인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는 이념의 파도 위에서 몹시 흔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고정시키는 닻의 역할을 한 존재였다.

그는 죽어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존재는 아직도 판결문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노인이던 그의 아들 생사도 모른다. 나도 늙었다. 내가 경험하고 쓴 이 글이 내가 죽은 후에도 한 강직한 판사에 대한 증거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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