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전공의 사태를 보는 시각…”의사들 자존감은 소명의식에서”

의사들의 자존감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서 사회에 향기를 뿜을 때 저절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의사들이 전문의 두꺼운 벽 안에 갇혀있지 말고 보다 성숙한 태도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했고, 당대표였던 김종인씨가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는데 응급실 스물 두 군데에 연락해도 치료해 주겠다는 데가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반 국민은 다치면 그냥 죽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의사들의 사실상 파업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 한복판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젊은 환자의 팔다리가 터져나갔다. 그 환자는 서울과 경기도의 모든 병원에서 거절당했다고 한다. 의료대란은 심각한 민생문제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엊그제 방송에서 박단이라는 전공의대표가 인터뷰하는 소리를 들었다.

“미국은 의사가 맹장수술을 하면 삼천만원을 받아요. 그런데 한국은 꼴랑 사십만원을 받아요. 병원은 적은 월급을 받는 전공의들로 버텨왔어요.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욕 먹기도 하고 얻어맞는 경우도 있었어요. 툭 하면 소송에 걸려 혼 나기도 하구요. 그런 문제들이 해결돼야 합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의료보험이 안 되는 미국이 꿈같은 나라일지도 모른다. 아픈 국민에게 미국이 좋은 나라일까. 아들이 미국에 있을 때 길거리에서 쓰러져 잠시 병원에 갔다가 다음날 퇴원한 적이 있다. 이천만원을 지급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인가 의문이었다.

사회주의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캐나다에 유학하던 중학생 아들이 다리가 찢어져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열 시간 넘게 기다려도 돌봐주는 의사가 없어 그냥 혼자 병원을 나왔다고 했다. 의사들은 그런 미국과 캐나다의 의료시스템을 선진 모범이라고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십여 년쯤 전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설사증세를 보이며 아파해서 급한 대로 노인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검사 결과지를 본 의사는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 의사의 사무적이고 찬 어조에서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했다. 앰뷸런스마저 내주지 않았다. 앰뷸런스 기사에게 뒷돈 주고 차를 빌려 천주교 계통의 대형병원으로 갔다. 대형병원 응급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수문장이 버티고 서서 못들어 오게 했다. 수문장은 전공의인 의사였다. 응급실 사정은 들어서 이해가 갔지만 죽어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간 내 입장도 절박했다.

응급실 앞 콘크리트 바닥에 어머니를 눕히고 그 옆에서 나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병원의 과장으로 있는 친구의 빽을 써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병원측에서 방법이 제시됐다. 하루에 백오십 만원 가량의 VIP입원실을 계약하고 며칠 그곳에 있겠다고 약속하면 응급실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돈을 쓰니까 응급실 문이 열렸다. 나는 속으로 분노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임종 때까지 돌본 그 병원의 또 다른 착한 전공의나 간호사의 천사 같은 태도를 경험하며 그 분노가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의사들이 정권과 격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고 응급실이 마비됐다. 국민의 생명이 볼모로 잡혀 정부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의사들의 투쟁 이유가 의대 정원을 늘려 부족한 의사를 확보하려는 정부 정책에 대한 저항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의사들은 극심한 노동과 과로를 호소하면서도 왜 일을 나눌 의사의 증원은 반대하는 것일까. 판사도 변호사도 전문직들은 모두 힘겹게 일하면서도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결사반대다. 왜 그럴까. 다시 의료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의료체계를 마련하게 됐던 것일까.

북한은 1960~70년대 무상의료를 선언했다. 국민 누구든 아프면 의사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임산부는 세계 최고수준의 대형 산부인과 병원인 ‘평양산원’에서 아기와 함께 무상으로 돌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내가 본 흑백영화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폭우 속에서 죽어가는 부모를 등에 업고 의원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다. 의원에서는 치료비가 없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절규하는 주인공이 세상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신현확 보사부 장관은 돈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죽는 국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신현확 장관이 심혈을 기울여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었다. 의사자격증만 얻으면 부자가 된다는 그 욕심을 자제시키고 돈이 없어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그 제도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세계 최고 의료시스템을 가진 국가가 된 것이다. 그동안 참아왔던 의사들의 불만이 의사증원을 계기로 폭발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사들의 평균수입이 변호사 등 다른 전문 직종과 비교해서 정말 열악한 것인지 파악해서 부족하다면 형평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의사들의 자존감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서 사회에 향기를 뿜을 때 저절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의사들이 전문의 두꺼운 벽 안에 갇혀있지 말고 보다 성숙한 태도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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