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2024년 여름 탑골공원, 1939년 종로 화신백화점
나는 2024년 7월 11일 점심 무렵 뙤약볕이 쏟아지는 탑골공원 부근의 종로거리를 걷고 있었다. 길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싸구려 짝퉁시계를 몇 개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궁색해 보이는 노인들이 있었다. 물건을 파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정물이 됐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앉은 바로 앞은 귀금속상점이 이어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금목걸이 금반지들이 노란빛을 튕겨내고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성이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에어콘 아래서 무료한 듯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서 젊음과 늙음 그리고 있음과 없음을 느꼈다.
종로는 우중충한 회색의 노인거리가 됐다. 노인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서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노인들은 다 종로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나는 뙤약볕 아래서 그 노인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그 줄이 끝나는 맨 앞으로 가서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중년여성에게 왜 그 줄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얗게 분을 바르고 짙은 빨간색의 립스틱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늘궁에서 노인들 무료급식을 위해 나왔어요. 하나만 기억해 두세요. 허. 경. 영. 알았죠. 허. 경. 영”
그 말을 들으니까 무료급식이 아니라 밥 속에 낚시가 들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종로거리는 나의 정신적 고향이다. 아직도 곳곳에는 소년시절의 그리운 냄새들이 묻어있다. 탑골공원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정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인 나를 만나기도 한다. 단성사극장에서 007 제임스 본드가 상영되면 표를 사기 위해 줄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오래된 유럽풍의 화신백화점 건물이 기억속에 친숙하게 남아있다. 얼마나 오래되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는지 입구의 포장석이 반들반들하게 닳아있었다. 85년 전 처음으로 당시 경성으로 불렸던 서울 구경을 온 시마키라는 일본인의 기행문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시절의 종로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마키는 오후 2시의 태양이 내려쬐는 종로통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길거리 전봇대에는 인기가수의 사진과 한글로 적힌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악기점과 양품점 옆을 지나갔다. 진열장 속의 반짝거리는 악기들이 보이고 유행하는 멋진 여성 모자를 쓴 마네킹이 그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런 신식 점포들 사이로 조선의 흔적인 듯 처마가 낮은 기와집인 가게들도 있었다. 철물점과 약초가게였다. 바깥이 가게고 안의 어둠침침한 곳에 주인이 묵는 방이었다.
길거리 노점상들이 보였다. 바나나, 고무신, 그림 등을 놓고 팔았다.
“나리 싸게 드릴테니까 사세요”
조선인 노점상이 일본말로 말을 걸어 오기도 했다.
가까이에 전각이 있었다. 보신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는 그 뒤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볼레로’라는 간판이 붙은 다방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 2층의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으로 만든 하얀 카버를 씌운 의자들과 탁자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앉아 칼피스 한잔을 시켰다.
다방 안에는 ‘오래된 화원’이라는 제목의 블루스풍의 노래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허공에 퍼지고 있었다. 창 밖으로 르네상스풍의 빌딩이 보였다. 경성 안내 책자에 있던 화신백화점인 것 같았다. 유리창들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입구에는 유럽의 무사 복장을 한 남자가 “어서 옵쇼”라고 조선말로 소리치고 있다.
조선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레지가 음료수가 든 유리컵을 탁자위에 놓을때 그녀에게 물었다. “경성에서 인기를 끄는 영화가 어떤 게 있나요?”
동경에서는 구라파에서 수입한 영화들이 흥행되고 있었다.
“외국영화로는 ‘아메리카의 비극’과 게리 쿠퍼 주연의 ‘모로코’가 단성사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조선극장에서는 불란서에서 온 ‘파리의 지붕밑’이 상영되구요. ‘지킬박사와 하이드’도 인기를 얻고 있죠.”
“수입 영화 말고 조선 영화는 없습니까?”
“조선 영화로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관객이 몰리고 있습니다. 이규환 감독은 나운규 감독의 냄새를 어느 정도 없앴고 촬영에도 특별한 재주가 있다고 하는 걸 신문에서 봤습니다.”
“창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빌딩은 뭔가요? 새로 지은 화신백화점인가요?”
“맞습니다. 화신백화점 동관입니다. 조선 기업인 소유의 백화점이죠. 최신식으로 경영되고 있어요. 지하 식품부에 가면 수입 소시지를 80전이면 삽니다. 250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죠. 매장에는 화사한 색의 고급 비단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여름이면 수영복과 수영기구들이 볼 만 합니다. 경성의 모던보이와 모던 걸들을 겨냥한 물품들이죠. 백화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구경하려고 시골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신발을 벗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분도 있고 타고나서 머리가 횡하고 어지럽다는 분도 있습니다. 백화점의 조선인 사장이 통 큰 경품행사를 했어요. 금시계나 옷 정도가 아니었어요. 성북동의 별장 한채를 내거는 바람에 손님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죠. 그 행운은 종로의 삼성당 약방에서 차지했습니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가까와 지고 있었다. 그가 다방을 나왔다. 퇴근을 하는 것 같은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짧아진 치마 아래로 미끈한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화신백화점 건물에 달린 빨갛고 파란 작은 등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의 정서는 그 시절의 종로통과 더 가까운 것 같다. 나는 고풍스런 화신백화점을 드나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모은 돈으로 그 백화점에서 화장품 하나를 사서 곱게 포장해 어머니 생일날 선물을 하기도 했다.
기억 속의 화신백화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우주선이 내려온 것 같은 지금의 유리 건물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