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100년전 장사의 신(神), ‘별표고무신’ 김연수

김연수

1921년 5월, 그는 일본의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서구식 기업경영의 세례를 받은 첫 조선인세대인 셈이었다. 그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7500톤의 관부연락선 코아마루에 탔을 때 이등선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던 노동자풍의 일본인 나가타는 세상에 대한 이런 불만을 털어놓았다.

“대일본제국은 너무 관대해. 조선인들에게 최고의 교육혜택을 주고 있으니까. 나 같은 본토 일본놈이라도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어. 그게 자본주의가 된 일본의 현실이지.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과자집 심부름꾼으로 자전거를 타고 대학에 배달하러 들어갔다 나온 것 밖에 없어.”

일본인의 푸념 속에는 그가 몸으로 깨달은 세상이 들어 있었다.

경성은 많이 변해 있었다. 메이지 마치에 조선은행의 웅장한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미스코시백화점, 조지야백화점이 화려한 장식등을 반짝이고 있었다. 진고개라고 불리던 혼마찌에 수천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 문화가 조선에 번지고 있었다. 일본 기생을 둔 요릿집 ‘화월루’가 구경거리였고 일본과자점 앞에 조선인들이 줄지어 섰다. 일본 자본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고 상권은 이미 일본인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자유경쟁의 세상이 왔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 대중의 생활필수품인 고무신으로 조선인 사업가로서의 첫번째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오베와 오오사카 일대에 산재한 고무공장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요코하마 고무공업주식회사의 공장에 묵으면서 고무신 생산공정을 노트에 치밀하게 적고 암기하며 공부했다. 생산량이나 공원들의 대우, 경영의 애로점을 하나하나 묻고 메모했다. 공장을 세우기 전에 각종 정보의 수집, 면밀한 시장조사, 기술도입등 철저한 사전준비가 경영의 필수조건이었다.

일본의 현지 공장들을 둘러보면서 설비나 기술면에서 앞서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그는 요코하마 고무공업주식회사의 공장에 묵으면서 고무신 생산공정을 공부하면서 노트에 치밀하게 적어나갔다. 생산량이나 공원들의 대우, 경영의 애로점을 하나하나 묻고 메모했다. 공장을 세우기 전에 각종 정보의 수집, 면밀한 시장조사, 기술도입 등 철저한 사전준비가 있어야 했다. 그는 일본의 현지 공장들을 둘러보면서 설비나 기술면에서 앞서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동창들이 일본 경제계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경성의 병목정(지금의 쌍문동)에 고무신공장을 차리고 공장 구석에서 먹고 자면서 일에 미쳤다. 그를 신뢰하는 지주인 아버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최신기계가 돌기 시작했고 드디어 ‘별’이라는 상표가 찍힌 고무신이 만들어져 나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섯개의 고무 공업사와 함께 선두주자인 이하영 대감의 대륙고무를 비롯해서 30여개의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규모 공장까지 합치면 200개가 넘었다. 동아일보 등 신문에 광고전이 치열했다.

이하영은 왕과 궁중의 귀인들이 신는 신이라고 광고하면서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하영 대감의 국왕을 동원한 선제공격에 ‘이강(李堈)전하가 손수 고르셔서 신고 계시는 만월표 고무신’이라는 선전이 등장했다. 이강 전하는 고종의 둘째왕자인 의친왕이었다. 의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발의식이 강했다. 만월표 고무신은 그런 이미지를 광고에 활용했다. 거북선표 고무신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하여 민족혼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동대문 근처의 고무신 가게를 돌아보았다. 판매대에는 그가 만든 고무신이 보이지 않았다.

별표고무신 광고

“별표고무신은 없습니까?” 그가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별표는 빛깔이 형편없어요. 일본제들 보세요. 얼마나 색깔들이 깔끔하고 예뻐요? 그리고 이하영 대감의 대륙고무에서 나오는 제품은 모양이 날렵한데 별표고무신은 너무 투박해요. 역시 고무신은 이하영 대감 회사 제품이 명품이죠. 임금님도 그걸 신는다고 하니까.”

그는 광고전략을 달리했다. 얼마 후 동아일보에 이런 광고가 나왔다. ‘강철은 부서져도 별표고무는 찢어지지 않는다’

광고에는 별표고무신이 육개월 안에 닳으면 새 신으로 교환해 준다는 판매조건을 달았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신으면 밑바닥이 금세 닳고 여기저기 돌에 부딪치면 찢어지는 게 고무신이었다. 고무신을 거저 준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고무신을 돌에 마구비벼 가지고 와서 새신으로 바꾸어 달라는 질 나쁜 소비자들도 있었다. 그는 새 신으로 교환해 주는 비율이 전체 판매량의 1%라는 걸 파악했다. 광고비라고 치고 그 판매전략을 밀고 나갔다.

별표고무신은 튼튼하다는 인식이 소비자들에게 박히기 시작했다. 그는 품질개선과 함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판매방식을 채택했다. 다른 회사들은 중간에 있는 중개인이 받아온 주문을 받고 파는 형태였다. 그는 사장부터 회사의 전직원이 동시에 판매원인 형태를 취했다. 직원들이 장돌뱅이가 되어 직접 상황을 확인해 가면서 입소문을 내게 만들었다.

보증판매제 1년 만에 그의 별표고무신이 이하영 대감의 대륙고무신을 누르고 업계의 우위를 차지했다. 일제시대 조선인으로서 장사의 신(神)이 되는 그의 첫 사업이었다. 그는 조선에 온 일본의 대기업들을 누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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