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친일과 ‘친일청산’의 한계

2021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생존애국지사 초상화 특별전시회

[아시아엔=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역임(한국근현대사), 건국대 대학원장 역임] 111년 전인 1910년 8월 27일 한일병합 조약 서명 전후의 조선은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일제시대를 돌아보면, 일본의 집요하고도 구체적인 정한(征韓) 전략과는 달리 한국의 대응은 그렇게 절박하지도, 전략적이지도 않았다. 그 밑바닥에는 중화주의라고 하는 백내장이 깔려 있었다. 합방 이전이나 이후의 지배계급은 전략 부재였다.

친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친일인지도 모른 채 친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1926년 이완용의 장례식 만장(輓章)과 운구행렬은 10리를 이루며 고종의 국장 이후 가장 화려(?)했다.

일제 강점기의 애국지사들에게는 참으로 송구한 말이지만 그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나 판사가 되어 ‘다쿠시’(taxi)를 타고 화신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일에 부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많이 있었다. 1942년 2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했을 때 조선의 소학교 학생들에게는 고무 공 하나씩을 선물했는데 그리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을 무렵 한국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사죄하는 대죄단(待罪團)을 조직하고, 이토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그의 동상 제작을 추진하면서 그를 활불(活佛)로 추앙했다. 그를 추모하는 절을 장충단에 지어 이름을 박문사(博文寺, はくぶんじ)라 했고, 그 산을 춘무산(春畝山, しゅんぼさん)이라 불렀다.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다. 장충단은 한말 우국지사를 기리는 제단이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지은 것도 한국인이었다.

따오기. 학명이 ‘Nipponia nippon’이다. 


따오기 파동

‘우리 안의 친일’은 오늘날 나아진 게 없다. 한 사례로,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인가부터 느닷없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온 ‘따오기’ 복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산이 72억원이라 한다. 그리고 위정자도, 국민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먼저 동요의 노랫말을 살펴보자.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1절)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2절)

이 노래 핵심어는 처량함,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떠나감, ‘해 돋는 나라’ 등이다. 왜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동쪽에 해 돋는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처량하게 해 돋는 나라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는 유쾌하지 않다. 작사자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썼는지는 각자가 짐작할 일이다. 관계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가사에서 교묘하게 은폐된 친일을 느낀다.

따오기의 학명이 ‘Nipponia nippon’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따오기는 꿩과 까마귀와 함께 일본의 세 가지 국조(國鳥) 가운데 하나다. 일본이 중국에서 따오기를 수입하여 복원한 것은 우리와 입장이 다르다. 모르고 했다면 무지요, 알고 했다면 기군망상(欺君罔上)한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입으로 친일 청산을 외치면서도 실상 친일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알게 모르게 익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친일이고 우리 몸 안에 얼마나 친일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반일을 외치고 있다.

일본이 한국과 운동 경기를 중계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중요 장면을 되풀이하여(replay) 보여 줄 때 불쑥 튀어나오는 화면이 있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욱일승천기의 간접광고다.

우리는 친일 청산을 외치면서 으레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과 합방 7적 이름을 거론한다. 그들이 역사에 지은 죄를 사면 받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망국의 모든 원인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반일을 외친 사람들이 과연 사태를 직시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김구가 “일제시대에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고, 따라서 그들은 감옥에 가야 한다”(Mark Gayn, Japan Diary, 433쪽)고 주장했을 때 그 말을 들은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아연실색했다. 김구의 주장에 대하여 여운형은 “국내파 민족주의자의 고통을 모르는 언행”이라고 반발하며 김구와 제휴의 희망을 버렸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해방이 되자 이승만은 친일 재벌 장진영의 돈암장(敦岩莊)에서, 김규식은 친일 재벌 민규식의 삼청장(三淸莊)에서, 박헌영은 함열(咸悅) 갑부 김해균의 혜화장(惠化莊)에서, 김구는 금광재벌 최창학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살았다. 이 집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의 집이었다.

일제 멸망을 감지한 친일 재벌들은 각기 집 한채씩 싸 들고 당대의 지도자를 찾아가 읍소하며 구명운동을 전개하기로 담합한 흔적이 보인다.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재산은 “나 정도는 받아 마땅한 대접”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 죄인이고 망국의 책임자이다.

지금의 친일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이 빚은 갈등이다. 우리의 망국사에는 분노만 분출할 뿐, 역사에 대한 자성이나 회오가 없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친일 청산의 한계

아마도 해방정국의 현대사에서 친일논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승만일 것이다. 공적(公敵)이 필요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무리에게 친일은 이승만에게 너울을 씌우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그럴 만한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민당원들 가운데 친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본다면 이승만의 초대 내각 각료 13명 가운데 친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윤치영과 유진오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독립진영 인사였다.

반(反)이승만 계열에서 이승만을 친일로 몰아붙였을 때 한민당으로서는 친일 문제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화두였다. 그들은 역공하지 않는 한, 설 땅이 없었다. 가장 격노하여 반격에 나선 인물은 조병옥이다. 당시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정치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친일 비리를 꿰뚫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친일(pro-Jap)은 먹고 살다 보니 저지른 일(pro-Job)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 기득권층 가운데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100년 역사를 살아온 조상 9족, 곧 3족(친가·처가·외가) 3대(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의 이력서와 호적 및 제적등본과 족보를 내놓고 따져보자. “우리 집안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가문이 과연 몇이나 될까? 노비와 화전민 빼고서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 9족 가운데 애국자가 없는 가문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열 사람의 의인만 살아 있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던 여호와의 약속(‘창세기’ 18장 32절)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명제다.

다시 국난이 온다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부터도 장담할 수 없다. 거대한 국가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의인이 없었던 적도 없지만, 역사에 애국자가 넘쳐나는 시대도 없었다. 꼭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사람을 대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여러 측면에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몇 명의 친일파에게 추궁함으로써 망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시키고 말았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장군은 지금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친일파 색출인가, 친일파 자식 색출인가?

필자는 형사법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친일파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에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 가끔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 행간에 연좌제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친일파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의 자식을 색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 치하나 붕괴 이전 공산 치하와 남미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의 추적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과거만을 지향하는 기억은 별로 좋은 게 아니다.

고대 로마의 격동기에 반역자 페르펜나(Vento Perpenna)에게 복수의 화신이 된 폼페이우스(Pompeius)한테 카토(Cato)는 이런 말을 했다. “지난 일을 묻지 말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지난 일을 문책하기로 한다면 도대체 어느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에게 대승을 거두고 전리품으로 얻은 금은보화와 비단을 병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빼앗은 문서 가운데 편지 한 묶음이 들어 있었는데, 조조의 부하 장수들이 원소에게 은밀하게 내통하며 보낸 것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조조에게 아뢰었다. “일일이 이름을 대조하여 모두 죽이시지요.” 그 말에 조조가 답했다. “원소가 강성했을 무렵에는 나도 마음을 바로 하지 못했는데 저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리고는 편지를 모두 태우도록 하고 다시 그 문제를 따지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은 당사자에 대한 ‘할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와 지주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하고 부역에 나간 필자와 독자의 조상도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영토도 없고, 국가도 없고, 국민도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우국적 기개만으로 항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시대의 애국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앞에서는 반일을 표방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그렇게 모은 돈으로 파티에서 포도주나 홀짝거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애국이 아니라 엽관이거나 생계형 취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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