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신복룡이 짓고 신복룡이 평하다···’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

[아시아엔=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대동단실기> <마키아벨리가 들려주는 군주론 이야기>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읽기> 저자] 돌아보니 내가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강의한 지도 어언 40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하고 싶었던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현대사의 이면에 들어갈수록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촘스키(Noam Chomsky, 1987, p. 51.)가 개탄했듯이, “세상의 진실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우울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덮어두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욱이 미국연방문서보관소(NARA)에서 공부하면서 채록한 1만5000쪽의 자료를 읽고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나는 본디 한말의 정치(사상)사가 전공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동학(東學)과 전봉준(全琫準)의 일생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을 계기로 시좌(視座)가 현대사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크로체의 주장처럼, “역사는 어차피 현대사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중요도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가까운 체험에 대한 회억(回憶)들이 더 절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는 유별나게 참혹했다는 것도 우리가 현대사를 주목하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어느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가릴 것 없이 그들은 자기의 시대가 역사에서 가장 격동기였다고 느낀다. 삶의 방법과 시대적 배경이 각기 달랐겠지만 고구려·신라·백제의 각축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나, 고려와 거란이나 몽고와의 전쟁, 조선조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고, 현대사에 들어와 망국과 해방, 그리고 분단과 한국전쟁, IMF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왜 세상이 이토록 힘들며, 어찌하여 나의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슘페터의 말을 빌리면,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이야 5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류나 나라 사이의 역학관계도 중요하겠지만 끝내는 사람의 결심이고 행위의 모둠이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의 흐름에 어떤 장엄한 예정조화나 시대정신이 존재했고, 거기에는 일관된 교훈이 연면히 이어져 왔다고 말하지만 뜻밖에도 역사는 단순하고 우발적이며, 인간의 오욕(色香聲味觸) 칠정(喜怒哀懼愛惡慾)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겪는 애환이나 부대낌이 철학이나 이상을 비웃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다.

이 책은 2001년 출판한 나의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그 책의 줄거리를 평이한 이야기 문체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통계가 다소 뒤늦은 것에 대하여 독자들의 양해를 얻고자 한다.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한국분단사연구>의 축약판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강단과 논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비사(秘史)와 슬프고 아름답고 추악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현실감이 있을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사실을 인간적으로 설명하는 능력”(ability to humanize the situation, Hope E. May)이 필요하다. 나는 칸트처럼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쓸 자신도 없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행태주의(behavioralism)를 중요한 도구로 삼아 해방정국을 살다간 사람들의 인성과 개인적 체험 또는 환경이 어떻게 역사를 편직(編織)해 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학의 주류논쟁에서 조금 빗겨 서서 교과서나 연구서 또는 강의실에서 말할 수 없었던 해방정국의 사람 냄새 나는 삶의 모습들을 그려보고자 했다. 해방과 분단 70년을 지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역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그래서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려는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한국사를 쓰면서 늘 선학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우리 학계에서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선행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의 연구가 대단치 않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연구에 동의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들의 연구를 읽음으로써 나의 생각이 이미 유행되고 있는 기존의 논리대로 고착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신돈(辛旽)과 묘청(妙淸)은 요승(妖僧)이었고,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자였고, 조선왕조는 억불숭유정책에 몰두했고, 주자학은 고루했고, 한민족은 일제에 피어린 투쟁을 전개했다는 식의 몽환적 전제에 매몰되는 것이 나는 싫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영국의 역사학자 스트래치의 글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의 대표작인 <빅토리아시대의 명사들> 서문에 나오는 명제, 곧 “역사가의 첫번째 필요조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ignorance is the first requisite of the historian.)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역사가는 기성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책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새 사료로 공부를 시작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릴 때 채색이 더 선명한 이치와 같다.

나는 스스로가 이 시대 역사학의 우상파괴자(iconoclast)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내가 본 한국 사학사(史學史)에는 허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베이컨이 말한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Novum Organum)에 갇혀 대롱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유념했던 또 다른 화두는,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해방으로부터 한국전쟁의 휴전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에 어림잡아 동족 300만명이 무고하게 죽었다. 그리고 그 죽임과 주검에는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이 덧씌워졌지만, 나는 해방정국의 한국인들이 이데올로기를 진정으로 숙지하고 있었던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밥을 해결해주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에게는 밥이 하늘이다”(食爲民天)라고 말했을 것이다.

1985년이었던가? 청주보호감호소에서 만난 이인모(李仁模) 노인과 서준식(徐俊植)씨, 그리고 전주교도소에서 만난 김성만(金聖萬)씨의 형형한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미전향 장기수 또는 양심수로 불리던 그들은 나에게 이념을 버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교정 당국에서 나와 함께라면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하면서 바깥 세상을 보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서준식씨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자본주의의 썩은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철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대구에서 만난 전평 경상북도평의회 간사인 이일재(李一宰)씨는 뇌졸중의 몸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논리를 들으면서 이념은 과연 무엇이기에 목숨을 거는가?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가족, 특히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자랑이랄 것도 없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나와 선대가 겪은 참담한 가족사를 털어놓으면서 “너의 애비와 할아버지는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기가 주저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망팔(望八)에 이르러 숨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썼지만 나에게는 원통함이 너무 많았다. 문득 되돌아보니 나도 벌써 현대사를 증언할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두렵고 무거워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귀찮고도 성가신 질문에 대하여 늘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조언하고 담론을 들려준 이화여대의 정병준(鄭秉峻)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李完範) 교수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한다. 아마도 이 두 교수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지식의 메모리 용량이 가장 큰 학자일 것이다. 그만큼 많이 공부했다는 뜻도 된다. 자주 만나 말씀을 들은 터는 아니지만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이정식(李庭植) 교수님의 글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자료를 찾는데 많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후학 박성진(朴城進)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다. 어려운 출판계의 동토에서 책을 내주신 지식산업사의 김경희(金京熙)사장님과 좋은 책을 만들려고 고생한 김연주(金蓮周) 선생께 마음 깊이 고맙게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겪은 추억 가운데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강호(江湖)에 의외로 고수가 많다는 점이다. 하남에서 농사를 짓는 이효영 선생이 오래 기억에 남고, 많은 자료를 보내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김홍일(金弘壹) 장군의 비서였던 이경식(李京植) 선생의 말씀도 참고가 되었다. 많은 이면사를 기억하시는 분이었다.

서문을 쓰려니 앞으로 내가 몇 권의 책을 더 쓸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몸이 좀 허약하기는 했지만 나는 늙어서도 글을 쓰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병을 앓고 시력이 떨어지고 기억력마저 감퇴하는 것을 겪으면서 이제 내려놓아야(下心) 할 때가 가까워온다 생각했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시름)에 나오는 싯귀, 곧 “늙음이 점차 다가옴이여,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두렵구나”(老冉冉其将至兮 恐修名之不立)라는 문장이 머리를 맴돌며, 삶이 무상해진다. 앞으로 써야 할 책이 몇 권은 더 남았는데···.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과 후학들에게 감사하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2016년 추석날 신복룡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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