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총리 시대···한일관계 정상화의 조건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2020년 9월 24일 첫 전화 회담을 가졌다. <이미지 연합뉴스>

[아시아엔=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전 석좌교수] 5G의 시대에,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유교가 아세아적 가치로서 아직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역사결정론으로서의 세 가지 요소, 곧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는 아직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천시란 역사의 주기를 뜻하는 것으로서 오래전부터 아놀드 토인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지리는 역사를 그리는 화판(畫板)으로서 헤로도토스(Herodotus) 이래 부동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인화는 역사(歷史)란 곧 인간의 역사(役事)임을 설명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결정론은 최근 몇년 동안 교착상태를 거쳐 이제는 아예 얼어붙은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시기적으로 볼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로 바뀐 지금이 한일 두 나라가 출구를 찾는 데 적기이다.

스가 신임 수상은 전임 아베와는 달리 일본 정가의 성진골(聖眞骨)이 아니어서 운신의 폭이 좁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역이 바꾼 것만으로도 그동안 자존심과 오기로 버틴 한일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전적으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일관계는 비본질적인 감정 충돌의 성격이 짙다.

정서적 혐오감을 외교의 원리나 국익만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멈추어야 할 때 멈추는 여유와, 국내 세력의 집결을 위한 내수용(內需用) 버팀보다는 실리의 계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측에서 한발 물러서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첫째로는 오랜 걸림돌이 되어온 위안부 배상 문제를 정리할 때가 왔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내의 스캔들과 조약상의 의무로 볼 때 그 문제가 국내정치의 도구가 되기에는 이미 동력을 잃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합의를 추인하는 선에서 양보해야 한다.

그 내용이 흡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국내 스캔들을 호도하는 논리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외교 원리의 첫 조항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이다. 이 문제를 박근혜 정권 지우기의 연장이나 실정(失政)을 비난하는 선상에서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지금과 같은 접근방법으로서는 “그것도 나라냐?”는 일본 지식인의 지탄과 지한파의 이탈을 막을 수 없다.

둘째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충분하거나 만족할 수는 없지만, 대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았다는 상징적 가치로 위로를 삼아야 한다. 한국 내의 일본 기업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은 참으로 하책(下策)이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정부가 부담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1965년의 한일협정문과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함께 국제 재판에 제소했을 때 한국이 이길 승산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러한 법리상의 승패를 떠나서, 징용 배상의 문제는 국익의 차원에서 고려할 때, 일본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은 전혀 득책이 아니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그만큼 아픔을 겪게 되리라는 셈법이나 대응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대미관계나 대일관계의 밑바닥에는 80년 전에 처칠이 얄타(Yalta)에서 루스벨트에게 충고한 바와 같이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라는 환상”이 유령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현대사의 어리석은 미망(迷妄)이었다. 일본의 혐한(嫌韓) 행위는 우익의 선거용이 아니다.

아베가 재임 시절에 한국에 보인 적대적 정책은 선거를 맞아 국내 극우 세력을 무마하려는 것이므로 선거가 끝나면 달라지리라는 우리의 계산도 빗나갔다. 일본인의 정서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일부의 혐한 감정은 오랜 적층(積層) 정서이지 선거 때만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일정한 인내와 체념이 필요하다.

셋째로 동해나 독도의 문제를 두고 일본과 꼭 같이 맞대응하는 것은 저들이 바라는 바다. 서해가 중국에는 동해이고, 황해라는 국제적 지명은 사라져가고 이미 중국해로 굳어가고 있다. 우리는 해양문제를 놓고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에 몰두하는 동안 서해에서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서해가 중국에는 동해이듯이 동해는 일본에게 서해임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문제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서해의 국제수로국 명칭을 ‘황해’로 지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듯이 동해를 ‘청해’로 지킬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증거가 일본에 있듯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자료가 한국에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나? 암 전문의의 말을 빌리면, 어차피 암을 근절할 수 없는 바에야 암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고 한다. 세상의 이웃이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국제 사회에는 화목한 이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하지 않은 사마리아인’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기에는 인내와 체념과 굴욕과 인도주의의 복합적 고민이 필요하다. 착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적국으로 모는 것은 문화국가가 가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을 수는 없지만, 일본을 적으로 몰아 우리에게 좋을 것이 적다. 그러므로 지금이 한일 관계 정상화의 적기이다. 한국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출구를 열어주는 것이 대인의 풍모다. 지고 살 때도 있고, 손해 보며 살 때도 있는 것이지, 어찌 우리는 늘 축구도 이기고, 늘 흑자를 내고 살아야 하는가? 아마도 스가 요시히데도 그 출구를 기다릴 것이다.

그가 아베 신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옳고,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한일관계의 새로운 전개를 모색하는 것은 그것과 별개 문제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사실에 더 이상 가위 눌릴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열패감에 괴로워할 것도 없다. 2천년 전에 줄리어스 시저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배를 강변에 두고 가야 한다.”(Postquam nave transiit flumen,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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