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나의 장모님 고초를 이제 알 듯합니다…최익환 선생과 조선민족대동단

대동단결선언문

[아시아엔=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 저자] 이 글을 삼가 고(故) 역전(力田) 최익환(崔益煥) 선생과 그 옛 동지들의 영전(靈前)에 바칩니다. “인생은 흰 망아지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내다보는 것처럼 빠르다(人生如白駒過隙, <삼국지> 107회)”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선생께서 1959년에 타계하신 지도 어언 60년 너머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어 선생과 함께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첫 동지들은 모두 유명(幽明)을 달리했고, 오직 한기동(韓基東) 선생만이 충남(忠南) 서산(瑞山)에서 백세의 천수를 누리시다가 1997년에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이 글을 준비한 지도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의 영애(令愛)인 최명화(崔明和)와 1969년에 결혼하여 선생의 행적을 어렴풋이 들었을 때만 해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자료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라는 비밀결사가 항간에 구전(口傳)되는 정도로 밖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는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단편적으로나마 아내나 선생의 옛 후학들로부터 들은 선생의 고매(高邁)한 민족혼이 저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의 외아들이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우쭐한 심정으로 부친께 등록금을 요구했더니, “이 세상에 너보다 더 똑똑하면서도 공부를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많은데 내가 어찌 너의 등록금만을 대어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자식의 학비를 마련해 주지 않아, 동지들이 마련해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저도 자식들을 둔 한 아비로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저는 제 아내와 좀 더 빨리 인연을 맺어 생전에 선생을 뵙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늘 머리를 스칩니다.

그 후 제 자식들에게 “너의 외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고 가훈(家訓)을 들려주고자 자료를 찾아 도서관을 뒤지고 전국에 생존해 있는 선생의 옛 동지와 후손들을 찾아다닌 지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저는 이제 저의 자식이라든가, 부족한 이 사람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해 주시다가 수(壽) 80으로 세상을 떠나신 빙모(聘母)에게 보답한다는 사사로운 생각을 넘어, 한국의 민족운동사를 공부하는 한 학도로서 대동단의 기록을 발굴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제게 부과된 하나의 의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동단이 점조직의 비밀결사였고 생존자도 많지 않아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면서 이제 겨우 한 권의 책을 엮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추억될 보람도 많았습니다. 임종(臨終)이 가까운 박형남(朴馨南) 선생을 북아현동으로 찾아갔을 때 노안(老眼)에 눈물을 적시며 맞아주시던 일이며, 서산(瑞山)의 한기동(韓基東) 선생을 찾아갔을 때 능소화 우거진 전원에서 60년 전의 사건을 또박또박 들려주시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72년의 어느 날에는 이을규(李乙奎) 선생이 위독하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휘경동 자택을 허겁지겁 찾아갔으나 생전의 모습을 뵙지도 못하고 영전(靈前)에 분향(焚香)만 하고 돌아오면서 자신의 게으름에 괴로워한 적도 있습니다.

생존자와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뼈저리게 느낀 것은 그 후손들의 거의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 애국자인들 자식을 위해 독립 운동을 한 분이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저들보다 조금은 더 배운 제가 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끝에 1977년에는 대동단원으로서 서훈(敍勳)을 받지 못한 전협(全協) 선생 외 29명의 포상(褒賞) 신청을 저의 명의(名義)로 원호처에 제출했으나 “생사불명” 등의 이유로 모두 기각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독립유공자 포상이라도 받으려고 그들이 민족전선에 투신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제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미 포상을 받은 선생께서 옛 동지들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자그마한 우정이요, 그 일은 저만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그토록 그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선생의 간고함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난마와 같은 해방정국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과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議員)으로 정계에 몸담았지만, 남한의 우익적 분위기에서 진보세력의 입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나마 감당해야 할 역사의 몫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쟁의 휴전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유엔군에서는 선생과 북한의 외무상 박헌영(朴憲永) 및 사법상이며 서울시인민위원장이었던 이승엽(李承燁)과의 친분을 고려하여 휴전 교섭의 비밀요원으로 북한에 파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1년 10월 어느 날 미군이 마련해준 보트를 타고 강화 교동도(喬桐島)를 거쳐 북한에 입국했으나 그때는 이미 박헌영과 이승엽이 종파분자로 몰락한 탓에 그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가 19개월이 지나 1953년 5월에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최익환 선생의 북한 밀파 사건이 북한에서는 남로당(南勞黨) 숙청의 빌미가 되고 있을 무렵, 귀국한 뒤의 박진목 선생과 최익환 선생은 방첩대(CIC)로 연행되어 간첩 혐의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미국의 밀명을 받고 북행했음에도 간첩으로 취급받은 것은 그가 귀경했을 무렵에는 그를 북파한 실무자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전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남한의 김창룡(金昌龍)은 이를 조봉암(曺奉岩) 숙청의 빌미로 삼고자 유도했습니다. 최익환은 그의 독립투쟁 경력이 고려되어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의 적의(敵意) 속에 불우한 일생을 마쳤으며, 박진목은 간첩죄로 1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습니다. 밀파 당국자인 미국은 모른 척했습니다. 본디 ‘실패한 밀사’에 대해서 당국자들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룬 결실도 없이 고통만 당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어쩌면 역사의 제물이었을지 모릅니다.

언제인가 나의 장모는 북한 밀파 사건에 대하여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반(최익환)은 본디 들고날 때 말씀이 없는 분이어서 또 감옥에 갔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1년이 넘게 보이지 않자 세상 떠난 줄 알았다네. 북한에 다녀왔다는 말은 몇 년이 지난 뒤에 남들에게 들었네. 그분은 가정에 참 무심한 분이었어. 그래도 혈육의 정은 있었던지 떠나던 날 열다섯 살짜리 어린 아들을 불러내어 어느 여관에서 껴안고 잤다는군. 아들이 눈을 떠 보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네.”

1959년 7월 21일, 선생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치하에서 박해를 받다가 성북동 셋방에서 아내와 두 남매를 남기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익환동지장(同志葬) 장례위원장 신숙(申肅) 선생은 “15년에 걸친 옥고와 섭생을 하지 못한 채 향년 70세도 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에게 애국훈장 하나 올리지도 못한 안타까움”을 조사(弔辭)로 남긴 뒤 버젓한 장지도 구할 수 없어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

다행히도 1968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상향 추서된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겨우 위안을 삼을 수 있었고, 이듬해인 1991년에야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천장(遷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송구하게도 다음과 같은 비명(碑銘)을 써드렸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생토록 신산(辛酸)한 삶을 살다간

우국지사 역전(力田) 최익환(崔益煥) 선생 이곳에 잠들다.

일제 치하에서는 옥창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했고 노년에는 이 민족의 통일과 진보정당의 발전을 위해 영일(寧日)이 없었으나 그의 생애에 후회는 없다.

“역사는 과거나 현재에게 들려주는 대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습니다. 비록 선생께서 잡초만이 무성한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고, 옛 동지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부족한 이 글이 대동단원들의 단심(丹心)을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저는 그 하나만으로도 지난날의 모든 고단함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69수(壽)의 간난(艱難)한 생애에 어느 한때도 영화(榮華)가 없었고 말년에는 성북동 셋집에서 아사(餓死)나 다름없는 최후를 마치신 그 여한(餘恨)을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마는, 바라건대 영혼이나마 지하에서 편히 잠드소서.

1982년 팔월 한가위에 신복룡(申福龍) 재배근서(再拜謹書)

2019년 2월에 개고(改稿)

역전 최익환

*최익환(崔益煥, 1890~1959)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0대 중반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했으나, 잘못을 깨닫고 항일의 길을 걸으려다 체포되어 5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모색했으며, 3․1운동 직후 전협(全協) 등과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했다. 일제강점기 다섯 차례, 10년 넘게 투옥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 신한민족당 대표를 지냈으며,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임되었다. 한국전쟁 중 비공식 휴전협상에 나섰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했다. 호는 역전(力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조선민족대동단

대동단은 1919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조직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불붙던 4월 초 결성되었다. 두암(斗庵) 전협(全協), 역전(力田) 최익환(崔益煥), 권태석, 권헌복, 정남용 등이 주축이었으며, 동농 김가진이 총재를 맡았다. 대동단 명칭은 최익환이 제안했다. 대동단은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조직을 지향했다. 단원을 황족·진신단·유림단·종교단·교육단·청년단·군인단·상인단·노동단·부인단·지방구역 등 11개 지단으로 나누고, 각각의 조직책을 ‘총대’(總代)라고 불렀다.

대동단은 결성 직후인 4월, 조선민족대동단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진정서>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5월에는 <선언서>를 발표해,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의 자유발전을 광파할 것 등 3대 강령을 제시했다.

1919년 11월 28일, 당시 음력으로 기념하던 개천절, 대동단은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나섰다. 대동단 독립선언서는 동농이 기초했으며, 동농과 의친왕 이강 등 33인이 서명했다. 이것이 1919년의 네 번째 독립선언이다.

 

필자 신복룡

1942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고, 건국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선구적 학자다. 저서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은 갑오농민전쟁 연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24권에 달하는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를 번역해 펴냈다. <미스터 션샤인>으로 널리 알려진 맥켄지(F. McKenzie)의 <대한제국의 비극>을 처음 소개했다. 이 편지는 <대동단실기(大同團實記)> 1982년 초판 서문을 보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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