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취의’ 모범 김창숙이 세운 대학교는?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국회국정조사위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며 ‘사생취의(捨生取義)’라는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한다.
‘사생취의’는 <맹자> ‘<고자편(告子篇)’에 나오는 말로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좇음이라는 뜻이다. 비록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함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을 보면 “생역아소욕야 의역아소욕야(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나와 있다. 즉, “생명(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 것인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도 비록 목숨을 잃을지언정 옳은 일을 해야 함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닐까? 이 나라 최고 권력을 쥐었던 자들과 최고 엘리트라고 거들먹거리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이 의가 아니라 불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같은 뻔뻔함에 어찌 국민들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까?
맹자는 인의정치와 왕도정치로 전국시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사상가다. 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이 모두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생선보다는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도 원하는 것이고 의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의로움을 좇다보면 때로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사생취의는 정의나 진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공자가 말한 살신성인과 같은 뜻으로, 목숨보다도 인과 의를 더 중시하여 정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유교사상을 담고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유관순(1902∼1920) 열사는 일본 헌병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 출옥을 이틀 남기고 꽃다운 18세 나이에 차가운 형무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기 전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창숙(1879~1962) 선생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다. 일제 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의원을 역임한 분이다. 그리고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 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일제 강점기, 국가의 위기를 맞은 종교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저항했다. 특별히 유교가 지향하는 가치를 통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외세 침략과 국가 위기를 바라보던 김창숙옹의 고뇌를 되살려 보자.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僞儒)다. 오늘날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이러한 거짓 선비를 제거한 연후에야 비로소 치국평천하의 방법을 논의하는데 참여할 수가 있다.···세속의 선비가 한갓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말할 뿐, 나라를 구제하는 시급한 일을 강구하지 않음은 병통이다.”
김창숙의 일생은 자신을 바쳐 나라를 구제하는 시급한 일을 실천하는 유교 정신으로 표현할 수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창숙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한협회성주지회’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과 ‘신교육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제출했다. 이렇게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제1차 유림단 의거’와 중국에서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금운동을 벌인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정국에서는 분열과 이념의 대립을 극복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민족지도자들과 칠거두(七巨頭) 성명을 발표하는 등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창숙은 1927년 밀고에 의해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자세로 고문하는 경찰들에게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지 십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살아온 나날이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야단스레 고문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시를 읽은 일본인 경찰은 “나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선생의 대의 앞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의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맹자는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의로움을 택하겠다고 했다.
세속의 선비가 한갓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말할 뿐, 나라를 구제하는 시급한 일을 강구하지 않음은 병통이다.
김창숙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