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이 죽을 때가 되면 “껄 껄 껄” 하며 후회한다는 우수개소리가 생각난다.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는 것이다. 그 누구도 죽음은 피해 갈 수는 없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라고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사색(思索)하게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내가 죽는다면 나의 육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대로 살아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파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에서 “오늘 당신은 죽은 몸이라고 생각해라. 더 산다는 것은 덤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그 시간을 살라”고 했다.

노자는 “좋은 죽음은 아름답다. 좋은 죽음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때, 또 죽음이 언제 어디에서 찾아온다 해도 그 동안 주어진 삶의 충만함에 깊이 감사할 줄 알 때 가능하다. 죽기 전까지 살아온 삶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지 못하면, 존엄한 죽음이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는 불교신자로 선(禪)에 심취해 있었는데 췌장암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명연설을 하였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시람조차도 죽어서까지 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당신은 정말 잃을게 없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암이 재발하여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머리로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다만 물질적으로 장례식 비용을 위해 상조회사에 가입하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장례식 비용보다 죽음의 질을 성찰해야 한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죽음이 실패도 불행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의 정점(頂点)과 완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이나 질병의 고통, 마음의 상처, 힘든 삶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꾸준한 자기수행, 자기성장의 과정 없이 누구도 단번에 큰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종교적 표현으로는 영적성장을 통한 영혼의 각성은 하루아침에 얻어 질 수 없다. 삶 속에서 죽음의 사색을 놓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좋은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다. 그리고 죽음은 자연의 현상이다. 만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만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각자 주어진 삶에서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티벳 승려들이 소망하듯이, 죽음의 순간이 설령 눈부시게 밝은 빛과 하나가 되는 멋진 최후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1970년 중반부터 서구에서 연구한 근사(近死 near die)체험 현상이라는 게 있다. 근사체험은 호흡이 멎어 사망판정을 받았으나 심폐소생술을 받아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의 일부가 겪은 죽고 다시 살아난 체험이다.

그들은 터널을 통과해서 빛을 보고 교신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죽음이 꽉 막힌 벽이 아니고 열린 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이 임박한 중환자가 큰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죽으면 육신과 더불어 전 존재가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벽이 아니고 새로운 문인 것이다. 우리도 이제 죽음을 직시하고 사유함으로써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놓여나고, 죽음을 내포한 삶이란 끊임없는 내적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을 거론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당하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자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인가? 사람이 행할 바 도(道)가 많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하면 생과 사의 도에 벗어남이 없다. 우리가 살 때에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악도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을 밝고 조촐하고 바르게 길들여, 육식(六識, 眼 耳 鼻 舌 身 意)이 육진(六塵, 色 聲 香 味 觸 法) 가운데 출입하되 물들고 섞이지 않을 정도에 이르면 모든 죽음의 준비를 끝내고, 생전 자신천도(自身薦度)까지 마쳐 비로소 인생의 완성을 맞게 되지 않을가 싶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