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1930년대 창경원 벚꽃놀이와 재벌과 공산당

“경성거리는 숱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넘쳐났다. 서양음악이 들어와 대중화되면서 댄스가 유행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저마다 재즈와 블루스 혹은 왈츠의 춤바람에 빠져들기도 했다.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한해 팔리는 레코드가 120만장이었다. 그중 40만장은 조선의 소리판이었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1950년대 중반 창경원 벚꽃

1934년 4월 18일 저녁 경성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벚꽃놀이를 가기 위해 돈화문에서 창경원에 이르는 거리는 인파로 뒤덮였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었다. 전국적으로 벚꽃놀이가 유행이었다. 경성사람들은 물론 전국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올라와 전차를 타고 창경원으로 갔다. 종로 사정목에서 원남동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거리를 밝힌 1만개가 넘는 오색영롱한 전등불이 축제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수백명의 경찰관이 출동해서 호루라기를 불며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화사한 벚꽃 아래서 사람들은 찬합에 싸 온 김밥들을 먹고 있었다.

경성거리는 숱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로 넘쳐났다. 서양음악이 들어와 대중화되면서 댄스가 유행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저마다 재즈와 블루스 혹은 왈츠의 춤바람에 빠져들기도 했다.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한해 팔리는 레코드가 120만장이었다. 그중 40만장은 조선의 소리판이었다. 경성의 레코드업계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화산업도 발전하고 있었다. 극장가가 붐볐다. 종로에는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3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의 명동 을지로 쪽인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촌에는 황금관, 대정관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을 끌고 있었다.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들로 나뉘어지면서 자연스레 관객도 갈라졌다. 조선민중에게 불을 붙인 영화는 프랑스의 <몽파리>였다.

<조선일보>는 영화 몽파리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불란서 영화의 세례를 받은 경성 청춘남녀의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는 영화 몽파리의 그것이다. 거미줄보다도 더 설핏한 옷 사이로 움직이는 모던 걸의 몸뚱아리. 여자들은 길거리를 그런 벌거벗은 몸으로 쏘다닌다. 수십 수백의 벌거벗은 여자들의 관능충동의 변태적인 딴스 그것은 잔인음탕한 현대인의 신경을 자극하기에 족하다.

그 시절 일본 잡지 다이몬드사 주필 노자키 류시치가 쓴 ‘조선공업의 약진’이라는 글을 보면 1930년대 한반도의 공업발전 상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는 양질의 노동력에 임금이 저렴했다. 세금도 적었다. 지하자원과 전력이 풍부하고 그 가격도 저가였다. 규제가 적어 공장 건설이 사무적으로 편했다. 일본회사의 공장들이 한반도의 곳곳에 세워졌다.

청진에 제철소와 공장들이 들어섰다. 함흥에 노구치 재벌의 공장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장진강 부전강에 80만 킬로와트의 수력발전소가 섰다. 성진에 중공업회사의 공장이, 길주에는 펄프공장이 생겼다. 원산에는 석유공장과 제련소 등이 들어섰다. 부산에 미쓰비시 중공업의 선박공장이 서고, 경성 부근의 영등포가 공업지대가 됐다. 인천에도 자동차, 방적, 기계제작소 조선제강소 등의 공장이 있었다. 해주에 조선화약과 우베시멘트 회사가 있고 평양에 제당, 비행기회사의 공장이 들어섰다. 일본의 방적회사들도 속속 조선으로 공장을 옮겼다. 한반도에 투자된 일본기업의 규모는 본토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한반도의 경제가 부흥하고 있었다.

경성의 일본인 기업가들은 진고개와 남촌에 웅장한 저택을 짓고 미국에서 수입한 승용차들을 타고 다니면서 부(富)를 과시했다. 조선인 기업가들도 일본인 기업가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저택을 지어 살았다. 경성방직의 사장인 조선인 재벌 김연수의 집은 성북동 2400평 지상의 성 같은 양옥이었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 실린 조선인 재벌의 저택에 대한 묘사는 이랬다.

‘공기 좋고 냇물과 바위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성북동 일대에 병원 같은 외관의 양옥 2층이 김연수 사장의 집이다. 그 집에는 미국의 승용차 뷰익이 있다. 김연수 사장은 승용차가 있어도 그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출근한다. 그의 아버지 김경중 옹이 5전이 아깝다고 성북동에서 20리나 되는 계동의 맏아들 김성수 집까지 걸어다니기 때문이다. 자식된 도리에 조선 최고의 부자 김연수 사장은 자가용이 있어도 차를 탈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러시아혁명의 이념에 많은 조선인들이 감명을 받았다. 공산주의자가 된 젊은 조선청년들에 의해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조봉암, 박헌영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창립됐다.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자본가 계급과 투쟁할 것.’ 노농총동맹의 서약이었다. 회원 5만명이 넘는 노농총동맹은 조선공산당의 중요한 기구가 되어 있었고 각지에 지부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민족 내부가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우익은 송진우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일보 중심의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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