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일본군에 지원한 조선 청년들
1939년 발행된 일본 시사잡지 <모던 일본>을 본 적이 있다. 경성에서 일본 군인이 되겠다고 지원한 조선인이 12,300명이고 그중에서 600명을 뽑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해 전인 1938년에 조선인들에게 일본 육군에 지원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3000명이 신청하고 그중 400명을 선발했다고 했다. 일본군이 되기를 지망하는 조선인이 넘쳐나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일본군이 단번에 남경을 점령했다. 그 축하행사가 한반도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각급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낮에는 가두행진을 하고 밤에는 제등행렬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중국을 대국이라고 생각해 오던 조선인들은 중국의 수도를 일본군이 단번에 점령하자 혼돈에 빠졌다.
일본의 육군성은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에 조선인을 일본군으로 입대시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요구했다. 조선 주둔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만드는 문제가 연구되고 있었다. 일본장교들은 조선인에게 총을 주었을 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일본인과 동일하게 총을 주는 병역법의 개정은 조선인이 철저히 일본화되기 전까지는 힘들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실험을 했다. 먼저 조선인 출신 헌병 보조원과 경찰에게 총을 주어보았다. 특별한 저항이 없었다.
다음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문호를 열어 조선인도 일본군장교가 되는 길을 열어보았다. 별 무리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 조선인만의 중대를 편성해서 동만주 국경에 배치해 보았다. 만주의 여러 조선인 중대에 무기를 지급했지만 반항은 없었다. 그 정도면 조선인을 일본군으로 활용해도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1938년 최초의 조선인 지원병 400명이 모집되고 그중 일기생 202명이 6월 15일 지원병훈련소에 입소했다. 동경의 시사잡지 <모던 일본>의 1940년판을 보면 기자의 조선인지원병 훈련소 방문기가 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1940년 5월 28일이다. 경성 성동역의 식당 테이블에 앉아 지도를 펼쳐보니 조선인 지원병훈련소는 양주군에 있었다. 성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30분을 가니까 묵동역이었다. 역의 남쪽으로 낮은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훈련소가 보였다. 두 개의 높은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훈련소에는 300명의 조선인 생도가 있었다. 이번이 4기훈련생으로 제1기 제2기 각 200명 3기와 4기 각 300명을 합해서 모두 1000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셈이다. 훈련소는 내일이 졸업식이어서 지원병들이 떠들썩했다. 이발하는 이, 청소하는 이, 짐정리를 하는 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대강당에는 조선인 지원병 출신으로 전사한 이인석, 이형수 상등병의 사진이 걸려있다. 강당 뒤쪽의 병영이 지원병의 숙소였다. 먼저 들어온 지원병이 나가면 새롭게 다음 지원병이 입소하기 때문에 소위 기합을 받는 고생이 없이 모두 자유롭게 훈련을 하면서 일등병이 된다. 군대보다 편하다. 지원병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황궁과 이세의 신궁을 향한 절,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황국신민의 체조를 마치고 아침 식탁에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배를 채운다. 훈련소 증축공사가 진행중이다. 지금까지 3000명의 지원병 모집에 83,000명의 지원자가 쇄도한 것을 생각하면 증축은 앞으로 더 이루어질 것이다. 주임교수는 우미다 대령이고 교관으로 모리모토, 다나카가 근무하고 있다.
일본 잡지를 보면서 나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식의 벽에는 일본군으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검은 실루엣들만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게 사실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믿기지 않았다.
조선인들이 일본군 지원병이 되려고 몰려들었다는 그 당시 청년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26일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써 준 과거를 회고한 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소년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 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훈련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일본군 사관학교에 지망하고 장교가 됐다. 박정희를 연구한 조갑제 기자는 박정희로 하여금 군인의 길에 흥미를 갖도록 한 계기는 한반도로 진출한 일본의 군사문화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