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노인들의 세 가지 공통된 후회

가난한 날의 행복을 잊고 지내다, 문득…

밤바다로 나갔다. 하늘과 맞붙어 구별이 안되는 검은 공간 저쪽에서 오징어배 한 척의 노란 불빛이 반짝였다. 단조로운 파도 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밤의 고요와 침묵의 투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90대의 노인은 황혼과 밤 사이에 있는 짧은 순간을 즐기는 게 지혜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없이 살다가 바로 무(無)의 세계로 휩쓸려 가버린다고 했다.

89~90대 노인들이 많은 실버타운에 2년 가까이 있어 보니 노인들이 후회하는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다 살고 보니까 인생이 별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아둥바둥 힘들게 살았을까 하고 후회한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남들이 가는 학교를 가고, 남들이 좋다는 직업을 나도 얻어야 하고, 돈도 남들만큼 가지고 싶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허덕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혼자만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그게 내게 맞는 것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 판단할 여유조차 없이 사회의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매일 같이 빡빡한 일정을 계획하고 X표로 하루를 마감하기도 했다. 그런 경쟁의 트랙에서 벗어나 어딘가 있을 초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노년이 되어 동해의 밤바다로 나온 정도가 약간 벗어난 것이라고 할까.

부유한 친구, 권력을 가진 친구, 성공한 친구는 이런 작은 한적함의 특권을 가지기 힘든 것 같다. 나는 요즈음 언제가 행복했었지? 하고 세월 저쪽을 이리저리 살필 때가 있다. 신혼 초 달동네 작은방을 빌려 살 때 행복했었다. 부부가 누우면 방이 꽉 차는 좁은 공간이었다. 문밖의 콘크리트 바닥에는 석유풍로와 작은 나무 찬장 그리고 몇개의 그릇이 있었다.

김소운 지은 <가난한 날의 행복>

쉬는 날이면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하루종일 소설 한권을 읽어치웠다. 배가 고프면 석유풍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조금 열려있는 창틈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적함을 느끼던 습기 가득한 그날의 풍경이 행복으로 마음 깊숙한 오지에 새겨져 있다.

그 후 변호사가 되고, 넓은 아파트로 옮기며 생활의 여유가 생겨도 행복의 향기는 그 시절의 작은 방에서 가장 짙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젊어서 놀지 않으면 감성이 말라버려 나중은 없을 거라는 걸 조금은 예상했었다.

바쁜 중에도 삶의 여백과 한적을 즐기려고 노력은 했다. 일보다 여행을 선 순위로 올려놓고 단행하기도 했다. 의외로 그런 일들이 후회 되지 않는다. 실버타운의 다른 노인들을 봐도 젊은시절 돈을 좀더 벌 걸, 좀더 높은 자리에 갔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때 좀더 아이들과 놀아줄 걸, 그때 좀더 사랑할 걸 그런 것들을 아쉬워했다.

젊은 시절 큰 부자였다는 한 노인의 고백이 재미있다. 그는 예쁜 여자를 좋아했었다. 즐기는 데만 빠져서 명품을 사주고, 돈 주고 바람 피우는 여자들한테만 낭비를 하다가 어느 날 사업이 폭삭 망했다고 한다. 그는 부유했던 시절, 주변 가난한 친구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만약 다시 부자가 되면 절대 돈을 그렇게 낭비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다시 부자가 된다면 주변 사람에게 베푸는 데 쓸 거라고 했다. 체험에서 나온 진정한 후회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다. 그는 한 달 생활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해져 있었다. 주변의 현명한 노인들을 보면, 감정의 매듭을 풀고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며칠 전 저녁 실버타운 공동식당의 내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80대 말의 노인은 젊어서 사냥 즐기던 걸 후회했다. 엽총으로 노루를 쐈을 때 쓰러진 노루의 간절한 눈빛과 신음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다고 했다. 노루의 신음이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 때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엽총을 없애 버렸다고 했다.

노인들은 젊은 날 만들어진 응어리진 감정을 모두 풀어버리고 싶은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것들이 많았다. 젊은 시절 설날, 어느 국회의원 집에 부부가 세배 갔던 적이 있다. 그 집에서는 떡국 한 그릇 먹고 가라는 말이 없었다. 섭섭함이 가슴에 맺혀 오래갔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되고 응어리진 마음이 풀렸다. 모두가 내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돈이 없으면 정이라도 나누며 살라고 하고 싶다. 남과 매듭짓지 말고 살라고 알려주고 싶다.

오른 전세보증금을 걱정하는 내 딸이 그걸 알까. 돈벌이에 건강을 깎아 먹는 아들이 알 수 있을까. 입시 걱정으로 꽉 찬 손녀가 그걸 알까.

말하면 ‘꼰데’ 소리 들을까, 입을 닫고 혼자 글로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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