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혼자 놀 줄 아는 노년, 당당하고 아름다워”

“노년의 인생은 외로움을 견뎌가는 과정이 아닐까. 노년이 보라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 되려면 혼자 노는 능력을 미리미리 키웠어야 했던 것 같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평생 산과 들, 바다를 홀로 다니며 자연과 벗한 고 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혼자 노는 능력이 탁월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치과의사인 한 친구는 의원 문을 닫았다. 그는 허름한 자신의 승용차에 낡은 텐트를 넣어 가지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살고 있다. 해질 무렵 그가 있다는 고성의 해변으로 가보았다. 일흔살이 넘은 그는 텐트 앞에서 어두워지는 바다를 보면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노년에 여유가 있어 낭만을 즐기는 것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이혼을 하면서 재산을 부인에게 다 준 후 그렇게 떠돌아 다니는 것이다. 금년 여름 폭우가 쏟아질 때였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양천변에 텐트를 쳤는데 곧 물이 넘쳐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독특한 삶이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혼자 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언론인 출신 대학선배가 있다. 그는 퇴직한 후 지리산 마을로 들어가 12년째 혼자 참선 수행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도 혼자 노는데 이골이 난 것 같다. 그는 자기의 낡은 차 뒤의 의자를 눕히고 그 위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차는 조수석까지 온갖 살림으로 꽉 차 있다. 슬리핑백, 코펠을 비롯해서 없는 게 없다. 차는 이동하는 그의 세컨하우스쯤 된다고 할까.

작년과 금년 여름 어느날 새벽 2시에 망상해변에 도착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는 혼자 밤바다 위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본다고 했다. 그 역시 혼자 노는 능력이 대단했다.

밤 10시경 갑자기 여든여섯 살 고등학교 은사가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으로 찾아왔다. 이천에서 점심을 들고 빗속에서 10시간 운전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분은 교사 시절부터 봉고를 몰고 혼자 여행했다. 잠은 봉고 안에 둔 이불을 덮고 잤다.

선생님은 스스로 역마살이 낀 사람이라고 했다. 집에 있으면 좀이 쑤셔서 어디론가 세상을 흘러야 한다고 했다. 아흔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 버릇이 계속되고 있다. 내 방에서 주무시라고 해도 기어코 밖으로 나갔다. 실버타운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서 자는 게 편하다는 것이다. 혼자 노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다.

나도 40대 중반쯤 그런 시도를 해봤다. 카니발을 개조해서 잠도 자고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강원도 홍천 부근의 산속 야영장에서 자보려고 첫번째 시도를 해 봤다. 그날 따라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가 지자 밀도높은 어둠이 나를 둘러쌌다. 으시시한 느낌이 들면서 그곳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

한밤 중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앞에 차를 세우고 잠을 청하려고 했었다. 차들 지나가는 소리와 불빛에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그런 놀이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혼자서 노는 능력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인 같은 사람들의 차박생활을 말한 것은, 노년에는 혼자서 노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최소한의 돈과 건강이 받쳐주는 걸 전제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댓가인 연금이나 생존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실버타운에서 노인들의 삶을 보면 결국은 혼자만 남게 되는 것 같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서 전혀 낯선 동네를 산책하기도 한다. 혼자 존재하는 힘이 없으면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다.

젊어서는 시간만 있으면 친구들을 만났다.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낄낄댔다. 우리는 한덩어리 운명공동체 같았다. 모임에 빠지면 혼자 고립된 것 같이 허전했다. 환경이 바뀌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정도 색이 바래는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도 정치 얘기나 골프 얘기만 계속되면 시큰둥해진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 연애 얘기같이 공통의 뜨거운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화가 시들해지고 돌아오는 길은 공허하기도 하다. 결국 인간은 독립된 행성이었던 것 같다. 차라리 혼자 노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년의 인생은 외로움을 견뎌가는 과정이 아닐까. 노년이 보라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 되려면 혼자 노는 능력을 미리미리 키웠어야 했던 것 같다.

실버타운에서 혼자 노는 노인들을 구경한다. 주민센터에 가서 일을 신청해 봉지를 접는 노인도 있다. 하루에 3만원을 주는데 한 달에 구일 밖에 일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 노인도 있다. 허드렛일도 감사하면서 놀이같이 재미있게 한다.

일은 길게 늘어진 시간을 팽팽하게 당겨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텃밭에 나가 야채를 키우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는 노인도 있다. 혼자 노는 능력이 있어야 노년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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