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천사를 만났다
28년 전 여름,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장면이 갑자기 마음의 스크린에 펼쳐졌다. 적막한 산속의 무성한 나무 사이로 안개가 물같이 흐르고 있었다. 짙은 녹음으로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산책하기 위해 맹산으로 올라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숲은 덩굴과 잡목으로 가득차 한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 계곡을 따라가면 마을이 있겠지 생각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도대체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을 산속에서 헤맸다. 그날따라 나는 핸드폰도 물병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작은 바위에 앉아서 잠시 쉬면서 기도했다.
‘주님 길을 잃었습니다. 야산에서 죽기야 하겠습니까만 다리가 아프고 목도 마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인내하고 집으로 갈 수 있는 힘이나 주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얼마간 걷고 있을 때였다. 산자락의 중간에 송전탑이 보이고 벌건 흙길이 보였다. 임도였다. 산불이 옮겨붙지 못하도록 만든 길이었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들어서서 가기만 가면 산 밑으로 갈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임도로 들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걷다가 쉬고 걷다가 쉬고 몇 시간을 걸어도 길은 산 아래로 내려갈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분한테 다시 물었다.
‘정말 도와주시지 않고 계속 이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산 속에서 교신을 할 존재는 그 분 밖에 없었다.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쨍쨍 내려쬐던 햇빛이 서서히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얼마간 걸었을 때였다. 길 저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오는 게 보였다. 나는 길 중간을 막아서면서 손을 흔들었다. 차가 서고 핸들을 잡은 청년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맹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서 간절하게 사정했다. 일단 타라는 승낙이 떨어졌다. 조수석에 앉으려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바닥의 페트병 안에 뱀이 들어있었다. 핸들을 잡은 청년이 말했다.
“산에 올라왔다가 까치독사들이 있길래 잡아가는 겁니다.”
차는 굽이굽이 험하게 깍아 놓은 산길을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여기가 이천의 나뭇골인데 분당의 맹산에서 여기까지 오셨다면 무지하게 걸으신 거네요. 혼나셨겠어요. 저는 이천산림조합 서기인데 이 길은 일반인은 전혀 모르는 공사중인 임도예요. 이천에서 광주를 거쳐 성남으로 빠지도록 산 능선을 연결하는 중이죠.”
그가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계속했다.
“여기 산이 우습게 보여도 숲이 깊어서 의외로 위험한 곳이예요. 아저씨가 걸어오던 그 길에서 얼마 전에 제가 시체 한구를 발견했어요. 어떤 시체인가 하면 얼마 전에 대학입시 문제지 유출로 수배가 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와서 죽은 거예요. 한적한 곳이라 열흘만에 저한테 발견된 거죠. 시꺼멓게 썩어 있더라구요. 그 뿐인 줄 아세요? 지난해 감옥에서 나와 보복살인극을 벌인 김경록이 이 근처에서 숨어있다가 나무에 목을 매단 곳도 걸어오시던 곳이예요. 야산이라 만만히 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부근은 산이 깊은 곳입니다. 저도 얼마 전 지금 오신 길 아래 숲으로 갔다가 길을 잃어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지도가 있고 같이 간 노련한 산림반장이 있었기 망정이지 큰 고생을 할 뻔 했어요.”
그 청년이 지갑에서 꺼내준 비상금 3만원을 받아 나는 40km 떨어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8년 전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데 마음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날 ’죽기야 하겠습까만‘이라고 건방지게 기도했는데 너는 독사에 물릴 수도 있었다. 조난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네가 40km 거리를 택시 타고 돌아왔는데 내가 힘을 주지 않으면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니까 차를 태워준 그 산림조합 서기가 천사였던 것 같다.
천사를 만났다고 해서 제 얘기인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