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인생무대’에서 당신이 맡고 싶은 배역은?
60세의 현역 직장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퇴직 후 앞날을 생각하는 글을 보낸 분이 있다. 그 글을 보면서 직장이란 우리가 잠시 배역을 맡은 인생의 무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정년퇴직으로 한 배역이 끝나고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
30년 가까이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한 대학 동기가 있다. 퇴직하고 그는 공부를 해서 법무사가 됐다. 그는 70대 중반인 지금까지 백팩을 메고 전국 등기소를 돌아다닌다. 돈까지 벌면서 걷고 또 걷는 운동을 하니까 좋다고 했다. 다니던 회사라는 무대에서는 퇴장했지만 사람으로서 그의 은퇴는 없는 것 같다.
기자 출신의 고교 동창 한 사람은 퇴직 후 국어교사 자격증을 따고 우즈베키스탄에 한국어 교사로 가 70살 넘은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새로운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사랑하니까 활기가 돋고 새로운 흥분을 맛본다고 했다.
내 또래의 군 대령 출신은 퇴직한 후 몽골 산골에 가서 체육교사를 하면서 그곳 아이들과 뛰놀다가 지금은 돌아와서 과일나무를 키우고 있다.
사업 부도를 계기로 대학로 연극가에서 단역배우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연극반이었다. 그는 이 무대 저 무대 단역을 맡다가 TV드라마로 자리를 옮겨 중견 탤렌트가 되고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교수로 탈바꿈을 했다. 퇴직하고 목사가 된 친구들도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생무대의 첫 배역이 전방부대의 초라한 직업장교였다. 나는 화려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인생에서 내가 맡을 배역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역할을 맡았다.
군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번쩍거리는 계급장과 제복 그리고 수천명의 부하들로부터 경례를 받는 장군들이었다. 장교 시절 소박했던 선배가 장군 계급장을 달았다. 법대 출신이 장군 계급장을 달고 권총을 차더니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다. 어조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본래의 인간을 상실하고 신파극의 배우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무대에 익숙해졌다. 제복과 계급이 나인지 아니면 나라는 본래의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대위라는 계급장은 가벼웠다. 나는 잠시의 배역이 대위지 인간이 대위가 아니라고 마음 속으로 저항했다.
나의 두 번째 인생무대는 법정이었다. 법정은 화려하고 엄숙한 연극공연장이었다. 붉은 천의 등받이 의자 앞에서 검은 법복을 입고 앉은 재판장의 위엄은 왕 같았다. 그런데 그 자리는 더러 사람을 미쳐 날뛰게 하는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평소 양순해 보이던 판사 중에는 법정에만 나오면 표변하는 사람이 있었다.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법정에 나온 선배 변호사들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재판을 진행하고 선고하는 모습에서 그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묘한 잔인성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평소 상관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매끄럽던 게 연기인지 아니면 법정에서의 태도가 연기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런 재판장을 만나면 나는 법정이라는 연극무대에서 변호사라는 조역을 맡은 내 신세가 처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 지나면 그 누구나 인생 무대에서 내려온다. 늙고 병든 초라한 모습이 된 장군이 옛날에 병정놀이를 한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오만한 재판장 노릇을 하던 사람이 모임에서 여기저기 고개를 90도 숙이고 바쁘게 돌아다닌다.
곰탕 한 그릇 사먹을 처지도 못될 정도로 가난하게 된 재벌회장도 있다. 갈채를 많이 받았을수록 무대에서 내려오면 공허할 것 같다.
나는 어려서 피라미가 상어가 되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들같이 되고 싶었다. 중년과 장년 시절에는 엑스트라 내지 단역인 나의 배역에 불만을 품었다. 노년에 이른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내가 했던 일이 천직이었다. 매일의 생활이 섭리였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했다.
지위라든가, 직함이라든가, 재산같은 인위적인 환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이 행복하지 않을까. 명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본래 자기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인물은 위대하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것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잠시 맡은 연극의 배역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