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노인의 노동은 ‘행복’이고, ‘축복’이다”

“실버타운에 와서 노인들을 관찰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노년에도 자립해야 하고, 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치매나 중풍이 아닌 한, 혼자서 자기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결국에는 누구나 혼자가 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폐지 수거 노인 <사진 연합뉴스>

내가 있는 바닷가 실버타운에는 미국에서 역이민을 온 노년 부부들이 있다. 미국에서 수십년 살던 그들은 고국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1960년대 200달러를 가지고 나가 100만불 넘게 벌어 고국으로 왔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하는 분도 있다.

옛날에 시골 살던 사람이 서울 가서 돈 벌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이민 가서 고생했다는 그들은 노년에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찾은 것 같다. 미국 집을 그대로 두고 임대한다는 분도 있고 평생 저축한 돈을 은행에 두고 관리한다는 분도 있다. 그들은 노년을 동해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살다가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막연한 낭만적인 꿈과 현실의 그들이 하고 싶은 게 좀 다른 것 같다.

어제는 실버타운 공동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미국에서 온 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주민센터에 가서 일거리를 신청했죠. 종이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다는 단순작업을 하라더라구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정도 일하는데 하루에 3만원을 주더라구요. 남자 노인반 여자 노인반 따로 일하는데 얼마나 열심히들 일하는지 몰라요. 일을 하고 싶다는 노인들이 많아서 한 사람한테 한 달에 7일 정도만 일을 줄 수 있다고 하네요. 골프 치고 노는 것보다 일이 더 재미있어요. 작업반장이라는 여성 노인이 군기를 잡기는 하지만요.”

그에게 노동은 무엇이든 행복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었다. 실버타운 내에 있는 전직 교장선생님의 남편은 아침 일찍 주유소로 나가 차에 기름을 넣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연금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데도 일을 한다. 일하지 않는 것은 고통이라고 한다. 우두커니 앉아서 인생에 관해서 묵상하고 있는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며칠 전 미국에서 온 또 다른 80대 노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커다란 비닐봉투를 가지고 해변가에 가서 쓰레기를 줍고 싶어요.”

그는 일당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혼자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서울대 약대에 수석합격했다는 분이다. 미국에 유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50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해 온 교수였다. 그도 뭔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실버타운의 의사 출신 노인이 다른 노인들을 무료진료해 주는 걸 보기도 했다. 실버타운의 텃밭에서 파와 부추를 심어 마을의 식당에까지 그냥 나누어주고 다니는 노인도 있다. 노인들은 쉬기를 원하지 않는다. 놀기만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일을 하고 싶어한다.

나는 어제 오랫 만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법원으로 갔다. 끝을 내지 못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기획부동산과 악질 사채업자에게 걸려 땅을 빼앗길 뻔한 노인의 사건이었다. 사채업자가 경매로 그 땅을 넘기려는 걸 치열한 소송으로 막았다. 그들의 집요한 공격을 아직도 치러내는 중이다.

세상에는 터무니없이 억울한 일이 많다.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인지 수사기관이 알아서 정의를 실현해 주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의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도 변호사의 일이다. 사건을 의뢰한 노인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암에 걸렸고 다리도 절었다. 변론을 끝내고 법정을 나왔을 때였다. 그 노인이 감사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주변에서 암에 걸린 친구들 보면 벌써 많이 죽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제가 살아있는 걸 보면 변호사님이 소송에 수고해 주시는 덕분인 것 같아요. 소송 결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법원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혼자 걸어가면서 나는 흐뭇했다. 아직도 내게 일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를 느꼈다.

실버타운에 와서 노인들을 관찰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노년에도 자립해야 하고, 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치매나 중풍이 아닌 한, 혼자서 자기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결국에는 누구나 혼자가 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아내가 해주던 생활 관련 일들을 내가 직접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려야겠다. 건조되어 나온 옷들을 깔끔하게 개는 법도 배워야겠다. 지금은 기껏해야 혼자 라면 끓여 먹는 정도다. 앞으로는 찌개 끓이는 것도 배워야겠다. 겨울에는 눈도 치워야 할 것 같다. 해야 할 일들이 참 많다.

One comment

  1. 저는 의사입니다 엄변호사님보다 2살 많아요 .아직 일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벌써 빨래와 청소는 제 담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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