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아닐까?
40대 중반쯤 검진센터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막막했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고 화가 났다. 그렇지만 나의 능력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운을 인정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 하나를 떼 버리고 살아났다. 단념하니까 행운이 온 것 같기도 했다.
50대 초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부작용 확률이 0.02퍼센트도 안 되는 안전한 수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작은 확률에 걸렸다.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눈알에 주사침을 박고 약을 집어넣었다. 1년 후 다시 탈이 났다. 이번에는 안구에 넣었던 인공렌즈가 마음대로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다른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는 인공렌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의사는 여덟바늘이나 꿰매서 붙였다. 겁나고 힘들었다. 의사는 기적같이 인공렌즈가 잘 붙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데 내게는 갑자기 시야장애가 왔다. 다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말을 극히 조심하면서 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을 다친 것 같다고 했다.
아예 하늘이 내게 불운을 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주위에서 별별 처방을 얘기했다. 나는 단념하기로 했다. 시력이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누군가가 굳이 그렇게까지 괴롭히려고 하는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이 육십이 되던 해에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마음속으로 쳐들어 왔다. 성경 속 광야로 직접 가보고 싶었다. 그 욕구는 내 영혼을 휘어잡았다. 비행기를 타고 텔아비브를 거쳐 성경 속에 있던 미디안 광야로 갔다. 짚차를 빌려 타고 성경 속의 광야들을 돌아다녔다. 오봇광야를 거쳐 모압광야, 마지막에는 유대광야까지 갔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선 사이에 있는 유대광야의 바위굴에 들어갔다가 중동사막의 독충에 물렸다. ‘리슈마니아’라는 희귀한 독벌레였다. 사람의 몸속에 둥지를 틀고 번식하면서 내장과 살을 파먹는다고 했다. 그 독충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가 국내에 없었다. 약도 없었다.
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행위였다. 어쩌면 광야에 갔다는 자체가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한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겁먹고 울다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지에 봉사활동 갔던 의사를 만나 치료받았다. 그가 치료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불운은 몸에만 오는 게 아니었다. 악마를 만나 전 재산을 날리고 쪽박을 찰 뻔했다. 이혼소송을 내게 의뢰했던 여성이 내가 부자 남편으로부터 뒷돈을 받고 소송에서 자기에게 불리하게 했다고 배임죄로 고소했다. 그녀는 거액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다. 편집증이 있는 여자 같았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덤벼드니까 담당형사는 나를 증오의 눈으로 보았다.
검사도 판사도 그녀의 편이었다. 담당 대법관은 나를 보고 “뭔가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저 여자가 그렇게 덤벼들겠지”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손해를 보았다는 액수를 물어주면 나는 거리로 나가 노숙자가 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판결이 선고됐다. 내가 졌다. 그렇지만 감당할 만한 금액이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은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고 폭풍이 몰아닥치는 고통의 연속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순식간에 휩쓸리고 무너지고 병들고 약해지는 먼지와 재 같은 존재다.
나는 없는 게 본전인 사람이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피난민 아들로 태어났다. 완전 제로 베이스의 환경 덕에 어떤 경우에도 조금은 남았다고 생각하는 ‘덧셈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다. 늘 가진 것을 잃었다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사람은 ‘뺄셈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주는 잔을 마시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불운을 인정하고 단념하지 않으면 인생을 진정 손에 넣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단념은 패배와는 다르다. 나름대로 인생을 완결하려면 단념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다. 나무들은 산속에서 차가운 아침을 맞는다. 슬픈 깨달음이지만 이 세상을 건너가려면 불운을 인정하고 단념할 건 단념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