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소인’은 의심하고, ‘대인’은 믿어주고 용서해줘”
한 무기수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주먹이 강하고 몸이 날렵해 사채업자의 심복으로 있었다. 감옥 안에서 그를 유난히 괴롭히는 교도관이 있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방에 그를 끌어다 놓고 괴롭혔다. 벽에 밀어 부치고 목을 조르고 쓰러지면 밟고 짓이겼다. 찌는 듯한 한 여름에는 재래식 똥통에 머리를 쳐박고 있게 했다. 그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언젠가는 그를 잔인하게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는 어느 날 작업장에서 쇠톱 조각 하나를 감추어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감방에는 몇 명이 함께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꾸준히 창에 붙어있는 쇠막대를 조금씩 쇠톱으로 잘랐다. 감방에 있는 다른 죄수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작업이었다. 감방 벽의 철창은 사람은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그는 먹는 밥의 양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철창을 통해 머리통만 빠져나갈 수 있으면 탈출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뼈만 남았을 정도로 바짝 말랐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그는 탈출에 성공했다. 얼마 후 그는 교도관들이 사는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근처에 있었다.
그를 괴롭히던 교도관이 어린 딸과 웃으며 놀고 있었다. 사랑이 담긴 선량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날 밤 그는 교도관이 사는 아파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안에서 그 교도관은 딸에게 팔을 베게 한 채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떠난 책상 위에는 이런 메모가 남아 있었다.
‘너를 죽이려고 왔다. 그런데 용서한다. 앞으로는 남을 괴롭히지 말고 잘 살아라’
그의 용서는 피비린내 나는 일가족 몰살의 참극을 막았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가 지은 죄보다 그가 한 용서를 더 크게 생각할 것 같다. 내가 옆에서 지켜 본 또다른 용서가 있다.
나는 2년 정도 권력 실세의 보좌관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면 그는 권력의 2인자 자리에 앉을 거라고 예상했다. 어깨에 별이 몇개씩 달린 장군들이 일부러 휴가를 내어 그에게 눈도장 찍으러 오곤했다.
재벌회장이 면담을 신청하고 대법관과 국회의원들이 그의 눈치를 봤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그는 이른 새벽 출근하면 사무실 뒷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호기심에 몰래 엿본 적이 있다. 그는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그를 보좌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내게 마음을 주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권력이란 남용해야 제 맛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힘만 드는 거야.”
권력의 본질을 내게 알려주는 말이었다. 권력 근처는 투쟁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모략하는 부하 간부가 있다는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왔다. 부하 간부는 현직 대통령을 배신하고 차기 대통령이 될 후보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은 모략하는 부하를 믿어주었다. 방어도 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었다. 상관이 사실상 권력서열 2인자의 자리에 임명될 게 확실했다. 조용히 그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게 떨어졌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상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모략의 독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상관은 그만 두는 날 자신을 모함했던 부하를 불렀다. 상관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기로 했다고 하면서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상관은 보좌관이던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내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끝까지 미워하지 않아.”
나는 그에게서 ‘용서’를 배웠다. 용서라는 것은 나는 상처받고 죽지만 남은 살리는 일이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해를 가한 상대를 용서하는 행동은 그의 마음을 얻는 숭고한 행위가 아닐까.
소인은 의심하고 대인은 믿어주고 용서하는 것 같았다. 분노를 부추기는 것이 정의는 아니다. 용서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자의 길이라는 걸 배웠다. 괴롭고 눈에 띄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향기로 가득 찬 일이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복수를 단념한 죄인의 용서를 더 크게 보실 것 같다. 그리고 그 분은 복수를 대신해 주시는 것 같기도 했다. 모략을 했던 그 부하는 장관직을 수행하다가 일찍 죽었다는 부음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