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돈보다 여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 영혼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지구별 광경이 저장되어 있다. 죽는 순간 그 장면들이 재생되어 나를 미소 짓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기억들을 영혼에 담아 저세상으로까지 가지고 갈 수 있지 않을까.”(본문 가운데) <사진 박노해>

바닷가에서 다양한 여행객을 본다.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밤바다 해변에 작은 텐트를 치고 희미한 등불 아래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검은 바다와 밤하늘이 붙은 짙은 어둠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가 외진 소나무 숲 끝자락에 캠핑카를 세워두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작은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말없이 밤을 지새는 사람도 종종 본다. 인적이 드문 곳, 참된 고독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자연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방랑하는 정신’들을 발견한다.

공직에 있던 30대 후반 제네바로 출장 가서 한달 가량 혼자 묵은 적이 있다.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레만호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노동자나 기술자나,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바닥의 자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맑고 투명한 물가에서 삶의 한적과 여백을 즐기고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처음 보는 우물밖 세상 광경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정신세계는 우물 안이었다. 먹을 것 먹지 않고 쓸 것 쓰지 않고 해서 돈을 모아야 했다.

노는 것은 내가 목표로 하는 저축과 집이 마련된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게 정답 같았다. 나는 그 얼마 후 공직에서 사표를 내고 개인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부자가 아닌 한 어디에 있든지 돈의 속박이 강하게 죄어오기 마련이다. 돈을 벌어야 가족이 먹고살고 아이들 학원을 보내고 사무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돈이었다. 나는 돈에 어느 정도 몸과 정신이 묶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땀을 흘리는 지식노동으로 ‘일용할 양식’ 정도만 달라고 그분께 기도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원한다고 그렇게 해 줄 분도 아니었다. 돈을 따라간다고 부자가 될 운명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복이 있으면 애초에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을 것이다. 관념과 추상으로는 평등을 부르짖지만 애초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세들어 있는 사무실 옆의 땅 1백평은 법원서기를 하던 법무사의 소유였다. 변호사로 평생을 벌어도 그 땅을 사기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못 오를 산은 안 오르기로 마음 먹었다.

최소한의 돈만 벌면 거기서 영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여행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요즈음 바닷가에서 보는 젊은 사람들의 작은 음식점 경영형태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날 필요한 식재료를 마련해서 점심 전후 몇 시간만 영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즐기는 그런 모습과 유사했다.

나는 여행비만 마련되면 세계를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감동이 남아 있을 때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감동이 메마르면 나중에 호화로운 여행을 해도 종이장 씹듯 그 맛을 모를 것 같았다.

아직 젊음이 남아 있을 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뜨고 싶었다. 산다는 것은 영혼이 지구별로 여행을 온 것이다. 지구의 곳곳을 구경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돈, 돈 하면서 징징대고 사는 것은 금고 속에 들어가 지구 궤도를 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 돈타령을 한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궁상을 떨면 더 무시당하는 게 세상이다.

녹색 페인트를 두껍게 칠한 낡은 러시아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대륙을 횡단했다. 색 바랜 낡은 외투를 입은 러시아 시골 여자가 내게 말했다. 달러로 치면 1백불을 가지고 한 달을 살지만 러시아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가 쓴 소설이 있고 발레공연이 있다고 했다. 가난해도 자존감이 높은 민족이었다.

티벳인이 운전하는 털털거리는 짚차를 빌려 히말라야 계곡 사이의 노란 유채꽃밭과 작은 개울들을 지나기도 했다.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돌았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은 내가 속해 있던 세상과 사람들과의 이별 연습이었다.

죽음도 그 비슷하게 멀리 떠나는 여행은 아닐까. 나그네가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아무런 의무도 없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여행들이 좋았다. 그런 여행은 타고난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찾는 기회였다.

떠돌기 좋아 하고 유유히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들은 보통사람이 아닌 걸 알았다. 젊어서는 미래의 길을 상상하지만 칠십 고개에 올라서니까 지나왔던 구불구불한 길이 내려다 보인다.

돈보다 여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 영혼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지구별 광경이 저장되어 있다. 죽는 순간 그 장면들이 재생되어 나를 미소 짓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기억들을 영혼에 담아 저세상으로까지 가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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