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비틀즈 한 소절, 정훈희 ‘무인도’ 그리운 이 가을
아름다운 마음 한 조각을 담은 댓글을 보았다. 연휴에 노가다 일을 하며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추석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했다. 돈이 없어 여행을 못하지만 일하는 자리에서 파란 하늘을 보고 들꽃과 나무를 본다고 했다.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모습들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여행과 결을 같이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일을 사랑하고 마음의 제단에 음악을 바치고 산다고 했다.
마음이 열리고 영혼의 눈이 열린 성자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이든 주변이 평화로운 색깔로 물들 것 같다. 일정표에 끌려다니고 인증샷으로 자랑하기 위한 여행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자유로운 영혼이 무한한 시공간을 돌아다니며 지극히 평온한 제자리를 찾아 안착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은 아닐까.
노년이 된 지금까지 내게 가장 포근하고 따뜻함을 주는 곳이 있다. 서울의 변두리였던 낙산 아래 신설동이다. 나는 그곳의 오래된 일본식 집에서 자랐다. 세월의 더께가 묻고 약간은 궁상맞은 쿰쿰한 냄새가 나는 다다미방에서 살았다. 낙산 판잣집 동네는 짓눌린 듯한 검은 기와를 덮은 서민 한옥이 가득 찼다.
해방 후 집장사가 급히 지은 열평 가량 미니 한옥들이다. 두 사람만 마주 앉으면 방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겨우 한 사람정도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 미로같이 나 있는 동네였다. 처음 오는 사람이 그 동네로 오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빙빙 돌기도 했다.
흰 눈 소리 없이 내리는 날이면 나는 그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눈은 가난한 동네를 하얗게 뒤덮으면서 담장 위에도, 지붕 위에도 소복하게 쌓였다. 세상이 다시 살아나고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성북동에서 안암동으로 흐르는 개천은 소년 시절 나의 추억과 삶의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다. 냄새 나는 더러운 물이지만 밤은 그 더러움까지 가려주었다. 그 물결 위에 별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열다섯살 무렵 추석 풍경은 지금도 나의 인식의 벽에 그대로 붙어 있다. 나는 개천 옆 놀이터 파이프로 육면체를 만들어 높이 쌓아올린 기구 위에 앉아 있었다. 가을 하늘 허공에 노란 보름달이 무심히 떠 있었다.
그때 가슴속에 들어온 달이 칠십 넘은 지금도 내면에서 환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편한 장소가 그곳이었던 것 같다. 그곳은 힘겹고 시달릴 때 지극히 평온한 소년 시절 내 자리였다.
노인이 되어 그곳을 거닐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까까머리 검정 교복을 입던 소년 시절의 나를 만난다.
내가 친숙한 가구가 두 개 있다. 서너 살 때 절벽이라고 생각하고 기어 올라가 뛰어내리던 오래된 반닫이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산, 양반집에서 쓰던 중고품이라고 했다. 다다미 세장 넓이 할아버지 방의 유일한 가구다. 내게 그 반닫이는 할아버지 같은 따뜻함으로 지금까지 옆에 있다.
또 하나는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하고 산 작은 중고 책장이다. 일제강점기 베니어판을 잘라 만들고 니스를 바른 서민들 가구 같다. 그 작은 책장은 아버지의 하숙방을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책장 귀퉁이에 공책에서 오려낸 중학교 뱃지를 밥풀로 붙여 놓았었다.
아버지는 그 작은 책장을 내게 주었다. 나도 공책에 인쇄된 중학교 뱃지를 오려 아버지가 붙인 옆자리에 붙였다. 그 작은 책장은 아버지였고, 노인이 된 지금까지 내 옆에서 편안함을 주고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고요히 가라앉은 듯한 지극히 평온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고 있다. 삶이 요동치지 않고 근심 걱정이 사라진 그런 곳 말이다. 그 장소는 변화된 현실의 공간보다는 시간 저편에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흘러간 비틀즈 노래 한 소절이나 가수 정훈희의 ‘무인도’ 곡 속에 내 어린 날의 아련한 고향이 들어있는 것 같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시간의 벽을 두드리는 조용한 나의 사무실이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내 자리였다.
내가 쓰던 손 때묻은 책상은 나의 득음 바위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나의 영혼은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기도 했다. 나는 평안을 방해하는 자리나 번거로운 일들은 피하며 살아온 편이다. 나는 요즈음 드넓게 누워있는 푸른 바다 옆에 내 자리를 마련해서 살아가고 있다.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인적없는 해변을 혼자 또박또박 걸어간다. 방으로 돌아오면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집도 아니고 기도원도 아니지만, 내가 나에게 깊어질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