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그 모자가 다급하게 한 번만 더 돈을 꿔 달라고 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얻었는데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그 모자는 우연히 알게 된 의뢰인이었다.
미용사였던 엄마가 사채업자에게 걸려들어 어린 아들과 도망 다녔다. 돈이 없어 찜찔방을 전전했다. 아들에게는 라면을 사먹이고 엄마는 물에 불린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웠다. 모자는 마지막에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앞 광장으로 내몰렸다.
변호사인 나는 그 모자를 위해 사채업자와 싸움을 했다. 사채업자는 판사 앞에서도 독을 내뿜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모자를 묶었던 악마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모자는 작은 음식점을 차렸다. 매일 밤을 새우면서 몇백개씩 만두를 빚었다. 아들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엄마는 밖에서 서빙을 했다.
코로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아들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너무 힘이 드니 돈을 꾸어달라는 것이었다. 고민하다가 무리를 해서 도와주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 모자는 내게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하고 다시 더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칠십 고개를 넘었다. 돈 버는 일이 사실상 끝난 것 같다. 노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저축한 돈으로 죽을 때까지 검소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에 또 다른 험한 일을 겪었다. 살인죄로 15년 정도 징역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 비참했다. 오랜 세월 면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의 인생이 가련해서 매달 조금씩 돈을 보내줬다. 이빨이 다 빠졌다고 해서 틀니를 해준 적도 있었다. 마침내 지난해 1월 그가 석방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밥값이 없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운전면허를 따게 돈을 달라고 했다. 원룸을 구해달라고 했다. 트럭 한 대를 사주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가 막노동이라도 하거나 그게 안되면 노숙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내게 정 안되면 죽으면 된다고 했다. 왜들 그렇게 죽는다는 말을 쉽게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그가 목을 맨 채 허공에 죽어있다는 것이다. 화장장에 가서 그의 유골을 처리하면서 나는 그 허망한 인생이 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제각각 남보다 더 불행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불행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진짜 불행은 그 게 아닌 것 같다.
그들을 진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누군가가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유아의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불행하니 당신은 나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내가 해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선생쯤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
사회나 정부가 그들에게 답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신이 그들의 자살을 불쌍히 여길까?
나는 요즈음 가급적이면 긍정적이고 밝은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내 글을 보고 “너는 변호사니까, 돈이 있으니까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돈없는 불행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폐지 줍는 사람들의 불행을 모르느냐”며 “혼자만 노년의 여유를 즐기느냐”고 질책하는 분도 있다. 내가 정말 그들이 보듯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일까.
나 역시 검은 기억들이 많다. 그런데 깨달은 것은 아프다고 소리쳐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불행이 엉뚱하게 남을 위로해 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부정적이었고 비판적이었다. 세상을 냉소하고 나의 불행을 남탓으로 돌렸다.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그럴수록 마음 속에 검은 안개만 더 자욱해졌다. 결국 답은 나에게 있었다.
가난한 집 처마에 달린 고드름에서도 영롱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감옥 안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는 사람이 있고 바닥의 진창만 내려다 보는 사람이 있다.
감사하며 긍정적이 되는 것이 무지개나 밤하늘 별을 보는 게 아닐까. 불행을 말하면서 남에게서 위로와 답을 찾지 말고 스스로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